← 목차

제16회 언더우드 국제심포지엄 · 새문안교회

선물 안에서 살기

기독교 윤리는 어떻게 은혜에서 흘러나오는가

첫 번째 강연 (Living in the Gift: How Christian Ethics Flow from Grace) · 2026년 5월 30일

제16회 언더우드 국제심포지엄에서 행한 존 바클레이 교수의 첫 번째 강연. 그는 『바울과 선물(Paul and the Gift)』의 저자로, 바울 신학의 은혜를 평생 연구해 왔다. 이 강연은 그가 현재 집필 중인 책 — 은혜가 인간의 수평적 관계를 어떻게 빚어내는가에 관한 연구 — 의 일부이기도 하다.

올해 언더우드 강좌를 맡게 된 것은 제게 더없는 영광입니다. 저를 이곳으로 불러 주신 초청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 평생의 학자 생활 내내 한국에서 온 박사과정 학생들을 가르쳐 왔고, 그들이 연구를 수행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늘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를 직접 방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이 진심으로 기쁩니다. 이 강연들을 둘러싼 여러분과의 대화를 무척 고대하고 있습니다.

몇 해 전 저는 『바울과 선물(Paul and the Gift)』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작업은 저를 바울의 은혜 신학 깊은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 그 은혜가 어떻게 이방인을 향한 바울의 선교를 추동하고 방향 짓는지를 다룬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이 은혜가 수직적 차원, 곧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뿐 아니라 수평적 차원, 곧 우리가 서로 맺는 관계를 어떻게 빚어내는지도 탐구하고 싶었습니다. 지금 저는 바로 이 "선물 안에서 살기"의 사회적 형태 — 바울이 공동체를 세워간 방식 — 에 관한 책을 쓰고 있습니다. 오늘의 강연들은 그 도상에서 제가 해 온 사유의 일부이며, 여러분의 논평과 조언과 교정을 환영합니다.

이 첫 강연에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바울 서신에 나타난 윤리의 구조를 생각해 보려 합니다. 그 예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예루살렘을 위한 헌금을 호소하며 은혜를 말하는 방식을 살펴보겠습니다(고린도후서 8~9장). 거기서 바울은 은혜를 하나님의 선물인 동시에 서로에게 주는 선물로 이야기합니다. 다른 강연에서는 다른 본문으로 옮겨가겠지만, 오늘은 고린도후서 8~9장에 담긴 바울의 풍성한 은혜·선물 신학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그것이 "윤리의 구조"라는 우리의 물음에 많은 빛을 비춰 주기 때문입니다.

먼저, 개신교의 문제

잉글랜드 교회(성공회)에 속한 한 개신교인으로서 말씀드리자면, 저는 개신교 신학 전통이 기독교적 삶 안에서 윤리의 자리를 설명하는 데 종종 어려움을 겪어 왔다는 사실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을 두려워합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뱅은, 당시 선행이 흔히 영생에 이르는 수단으로 여겨지던 방식에 경악했습니다. 곧 선행이란, 신자가 자신의 인생 순례가 마침내 소망하던 영원한 본향에 다다르도록 보장해 주는 공로(merit)로 간주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루터는 강조점을 극적으로 뒤집었습니다. 그는 주장했습니다 — 당신이 얻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이미 받은 것에 초점을 맞추라고.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곧 의롭지 못하고 합당하지 못한 자에게 주어진 은혜 안에서 다 주어졌다 — 개혁자들은 그렇게 역설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선행을 미래의 구원을 향한 도구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당신의 구원의 근원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하는 것뿐입니다. 물론 선행은 있을 것입니다 — 나무에서 맺히는 열매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거래의 일부가 아닙니다. 당신의 선행은 보상을 사들이는 동전이 아닙니다.

루터의 한 이미지를 빌리자면, 당신 자신을 하나의 통로(channel), 곧 하나님의 선하심이 타인에게 흘러가는 도관(conduit)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친절과 너그러움과 사랑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통로 말입니다.

상류를 바라보는 윤리

그의 이미지를 한 걸음 더 밀고 나가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의 시냇물, 혹은 강처럼 생각해 보십시오. 개신교 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상류(upstream)를 바라보는 것 — 그 물이 어디서 왔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 근원에 늘 감사하며 언제나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냇물을 선행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흘려보냅니다. 그러나 당신 자신이 어디로 갈 것인지, 그 하류(downstream)를 바라볼 필요는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의미에서, 당신은 이미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가진 것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지, 무언가 다른 것 혹은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류를 바라보는 윤리

이러한 윤리의 구조는 여러분에게 매우 익숙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전통 안에는 — 종교개혁 이전에도, 또 개신교 전통 바깥에도 — 사물을 다르게 보는 또 다른 구조가 있습니다. 여기서 던지는 물음은 목표, 목적, 끝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지어졌는가? 우리의 합당한 운명(destiny)은 무엇인가? 이러한 사유를 헬라어 텔로스(telos) — '끝' 또는 '목표'를 뜻하는 — 에서 따와 목적론적(teleological)이라 부릅니다.

우리의 시냇물 은유로 말하자면, 이 물음은 이렇게 묻습니다. 「이 은혜의 시냇물, 이 강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당신이 그 안에 온전히 잠길 때, 그것은 당신을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이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 전체를 — 도덕적 행위와 목표까지 포함하여 — 하나님이 자신을 빚으시고 변화시키시는 방식, 곧 장차 올 생명에서의 미래의 완성을 내다보며 자신을 준비시키시는 그 방식의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당신은 물론 다른 이들을 위하여 선을 행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행함으로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 안으로 더 깊이 참여하게 되고, 더 선하고 더 온전한 사람 — 본래 지어진 모습에 더 가까운 사람 — 이 되기 때문에 선을 행합니다. 당신은 단지 하나님의 은혜가 타인에게 흘러가는 도관에 그치지 않습니다. 당신 자신이 그 과정에서 변화되고 있으며, 그 변화는 당신을 영원을 위해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의 치유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일의 일부입니다. 그 시냇물에서 헤엄칠 때,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을 데려가는 하류를 바라봅니다.

두 관점을 함께 붙들 수 있는가

이제 보게 되겠지만, 윤리에 관한 이 두 사유 방식을 서로 대립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은혜의 근원인 상류와 그것이 의도하는 운명인 하류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 서신을 탐구하는 내내 우리는 이 물음을 마음에 품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의 삶이 오직 그 근원 — 하나님과 그리스도 사건 — 인 상류를 바라보는 것에 불과하다면, 우리의 삶이 성령으로 새롭게 빚어지는 것이 바울에게 왜 그토록 중요한지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까?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이 말하듯, 왜 우리가 서로 사랑하되 행위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우리 자신을 다시 빚어내는 일이,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선행의 본질적 일부는 아닐까요?

루터 시대 이래 개신교 전통을 따라다닌 끈질긴 물음 중 하나는, 그것이 이른바 율법폐기론(antinomianism) — 선행은 하면 좋지만 결국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 — 에 빠지기 쉽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물음은, 그것이 이른바 영적 형성(spiritual formation) — 우리의 마음과 정서와 욕망을 다시 빚어내는 일 — 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중요한 것이 오직 우리 구원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뿐이라면, 우리가 은혜 안에서 자라기를 바라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동시에 정반대의 위험도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의 삶이 오직 그리스도 안의 우리 운명인 하류, 그리고 거기에 이르는 방식만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헤엄치는 그 시냇물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 그것이 다른 곳, 곧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왔으며 우리가 이 은혜로운 역동적 흐름에 전적으로, 또 끊임없이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 — 을 잊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또다시 우리의 선행을 수단화할 위험에 빠집니다. 바로 루터가 두려워했던 것 — 우리의 미래의 온전한 구원이,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덕으로 얼마나 채워졌는가에 달려 있다고 여기는 것 말입니다.

이 두 관점을 함께 붙들어 둘 길은 없을까요?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바울에게 분명히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되는 것이 아니며, 사실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로마서 6장). 우리는 단지 성령을 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하며(갈라디아서 5장), 참으로 성령을 위하여 심어 영생을 거두어야 합니다(갈라디아서 6장). 동시에 — 곧 보게 되겠지만 — 우리가 사랑과 너그러움으로 다른 이들에게 흘려보내는 그 은혜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곧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창조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의 산물이라는 사실이 그에게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어쩌면 우리는 양쪽을 다 바라볼 수 있습니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구원의 근원을 뒤돌아보고, 동시에 성령으로 다시 빚어져 하나님 안의 최종 운명에 더 합당해지는 우리 자신을 앞을 향해 내다보는 것입니다. 뒤를 보는 것과 앞을 보는 것 모두, 우리보다 더 크고 더 깊은 무언가에 참여한다는 것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잠겨 있고 또 그 안에서 헤엄치는 법을 배우는, 하나의 신적 운동(divine momentum), 흐르는 시냇물 말입니다.

오늘 제가 논증하려는 바는 이것입니다. 이 참여는 우리가 받은 것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또 우리를 통해 행하시는 것에 대한 감사 어린 인식과,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는 흐름에 들어설 때 일어나는 우리 자신의 욕망과 의지의 재형성 — 이 둘을 모두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이 참여는 하나님의 행위(agency)와 우리의 행위를 모두 인정합니다. 마치 둘이 서로 경쟁하는 것처럼 어느 한쪽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은혜의 구원하는 역동성에 참여하는 이 모습이, 제가 이제 초점을 맞추려는 본문 — 고린도후서 8~9장의 예루살렘 헌금에 관한 장(章)들 — 에서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8~9장 — 예루살렘 헌금에 동참하라는 호소

많은 학자들은 우리가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으로 알고 있는 이 두 장이 본래 별개의 편지였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 어쩌면 두 개의 서로 다른 편지였다가 후에 '고린도후서'라 불리는 편지 모음집으로 편입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이 장들은 매우 구체적인 초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자신의 헌금 프로젝트에 마게도냐 그리스도인들과 나란히 동참하기를 간청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바울의 다른 본문들(고린도전서 16장, 로마서 15장)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취지는 분명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들 — 대부분 이방인 회심자들로 이루어진 — 을 예루살렘의 유대인 모(母)교회에 묶어 두려 하고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운동을 하나의 단일한 실체로 결속시키려는, 서로를 향한 관심의 상호적 표징(reciprocal token)으로서 말이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선물은 유대를 만들어 냅니다(gifts create ties). 바울의 선교와 그의 교회들을 예루살렘과 함께 묶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제 필요를 채워 주는 동시에 사회적·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재정적 선물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바울이 이 헌금에 끌어들이려 한 교회들 가운데, 마게도냐의 교회들 — 데살로니가와 빌립보 — 만이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보아하니 발을 뺐고, 고린도 교인들은 기부를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중 하나는 분명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껄끄러운 관계 — 처음부터 삐걱거려 온 — 였습니다. 자신에 대한 후원과 관련해서, 바울은 다른 몇몇 교회로부터는 돈을 받았으나 고린도에는 후원을 요청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들이 제안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예루살렘을 위한 돈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그가 그 돈을 제대로 전달하리라고 온전히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몹시 열심입니다. 그는 고린도 교인들이 신뢰하는 디도를 먼저 보내고, 호소의 강력한 두 장(章) — 고린도후서 8~9장 — 을 써 내려갑니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온갖 수사적 장치를 동원하면서 말이지요. 그는 그들을 너그러운 마게도냐 교인들과 비교합니다. 이 일이 모두 정당하다고 안심시킵니다. 그들이 어떤 곤경도 겪기를 원치 않는다고 항변합니다. 그들의 여러 은사를 언급하며 추켜세웁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전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들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그들이 이 헌금에 동참해야 할 신학적 이유들을 풍성하게 제시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집중할 것은 바로 이 신학적 이유들입니다.

카리스(charis) — 하나의 단어, 세 겹의 의미

이 장들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바울이 헬라어 카리스(charis)를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이 단어를 '은혜(grace)'로 번역하는 데 익숙하고, 여기서도 바울은 분명 그런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카리스는 헬라어에서 선물(gift), 호의(favor), 그리고 감사(thanks)를 가리키는 통상적인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두 장에 걸쳐 바울은 카리스를 이 모든 의미로 사용합니다.

우리는 번역 과정에서 이 연결들을 종종 놓치지만, 헬라어 원문에서는 충분히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 효과는, 바울이 예루살렘을 위해 바라는 그 선물을, 이미 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그리고 그 선물을 이를테면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는 후속의 감사의 움직임에, 매우 단단히 묶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의 원(circle)으로 그려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 증여자들(여기서는 A와 B)을 거쳐, 감사 속에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원 말입니다.

바울이 가장 먼저 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리노니」 — 그들의 너그러움의 근원이 하나님의 은혜의 효력 있는 활동에 있음을 가리킵니다. 조금 뒤에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그들에게 상기시킵니다(잠시 후 다시 돌아올 구절입니다). 이 둘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운동이 은혜의 원을 개시(開始)함을 알립니다 — 그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며,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표현을 얻었습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그 선물을 또한 다른 이들에게 전달되는 카리스(은혜) 로 묘사합니다 — 고린도 교인들과 마게도냐 교인들로부터 예루살렘으로 옮겨가는 은혜로서 말이지요. 「너희가 다른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카리스)에도 풍성하게 하라」고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능히 그분의 카리스, 그분의 은혜, 그분의 선물을 너희에게 넘치게 하사 너희로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시느니라.」 은혜의 흐름이 이를테면 그들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로 넘쳐흐릅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9장에서 예루살렘 신자들을 이 은혜의 수혜자로 말할 때, 바울은 카리스와 그 관련어 유카리스티아(eucharistia)를 또 다른 의미로 사용합니다 — 곧 이 모든 은혜를 공급하시고 고린도 교인들을 부요하게 하여 베풀게 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서 말이지요. 그 감사가 이를테면 카리스의 원을 완성합니다. 하나님은 이 카리스의 모든 운동의 근원이자 목표, 그 시작이자 끝이십니다. 신자들은 그 운동에 사로잡혀, 자신들보다 더 크고 더 깊은 무언가에 참여합니다 —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고 동시에 자신들의 풍성함과 충만을 위하여 참여하는 것입니다.

시냇물, 곧 물의 흐름이라는 제 은유로 돌아가, 제가 처음에 윤곽 그린 이 역동성의 두 측면을 살펴봅시다. 도움이 된다면, 제가 말하는 동안 이 위대한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한강을 떠올리셔도 좋습니다. 먼저 이 은혜의 근원인 상류를 — 그리고 그 은혜가 수혜자를 감사하는 증여자로 바꾸어 놓는 그 힘을 — 바라봅시다. 그런 다음 이를테면 하류를 바라보며, 이 흐름에 사로잡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그것을 받아 다시 흘려보내는 이들에게 그것이 어떤 변화를 의도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상류를 바라보다 — 은혜의 근원

앞서 보았듯,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호소는 마게도냐 교인들의 기여를 언급하며 시작됩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것을 묘사하는 방식이 중요합니다. 그는 「우리가 너희에게 마게도냐 교회들의 너그러움을 알리노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가 너희에게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리노라」고 말합니다. 이 출발점 이후에 그가 하는 모든 말 — 마게도냐 교인들의 가난이 어떻게 일편단심의 헌신으로 넘쳐흘렀는지에 관한 모든 것 — 이 바로 이 출발점에서 솟아납니다. 그들이 그 너그러움을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는 운동 속에 자기 자신을 잠그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장에서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이 그들의 베풂의 역동성으로 이야기됩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9장에서 그들은 자신의 자원에서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이 주신 공급에서 베풀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아낌없는 표현으로 그립니다 — 「모든 은혜, 항상, 넘치도록, 모든 착한 일.」

이것은 번영 복음(prosperity gospel)이 아닙니다. 요점은 그들이 갑자기 물질적으로 부유해지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 자신이 가난하셨음을 알았고, 마게도냐 교인들이 부유함이 아니라 물질적 가난 가운데서 베풀었음을 인정합니다. 오히려 요점은, 비록 그것이 눈에 띄지 않고 양적으로 작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활동할 수 있는 어떤 길, 어떤 차원이 언제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장들 전체에서 바울이 베풂의 풍성함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는 헬라어 하플로테스(haplotēs)입니다. 이것은 양(quantity)이 아니라 질(quality)을 뜻합니다. 그것은 선물의 온전한 마음, 일편단심(wholeheartedness)을 의미합니다. 현금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spirit) 안에 있는 너그러움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이 재화를 서로 다른 형태의 잉여(surplus)로 분배하시는 세계에 거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른 이와 나눌 무언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핍의 두려움에 미리 사로잡힌 사고방식이 아니라, 베풂이라는 기본 기대치에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기대는, 물질을 베풀 형편이 못 되는 이들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압박을 가할 때 착취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언어는, 제 생각에, 무엇을 주는가에 대해 의도적으로 모호합니다. 그리하여 어떤 분량의 어떤 종류의 선물이든 신적 은혜의 흐름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려질 수 있게 합니다. 그는 넌지시 말합니다 — 잘 들여다보면, 돈이나 물질적 자원이 아니더라도 당신의 시간이나 관심처럼 무언가는 충분히 있을 것이라고. 그러니 당신 자신을 은혜 입은 자(graced)로 그려 보십시오. 그 흐름 속에 자신을 잠그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베풀 수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후서 9장 끝에서 이 선물을 받은 예루살렘의 반응을 상상할 때, 그는 예루살렘 신자들을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로 그립니다. 그는 말합니다 —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이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고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리라고. 마게도냐에서든, 고린도에서든, 예루살렘에서든, 모든 지점에서 바울은 이 헌금을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흐른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 안에, 또 그 배후에 있는 운동은 하나님의 활동이며 의도입니다.

여기서 신적 잉여는 마치 여러 단의 분수(fountain)처럼 그려집니다. 위로 솟구쳐 올라 한 층의 물웅덩이에 떨어지고, 그 웅덩이가 다시 넘쳐 아래층으로 쏟아지고, 한 층의 잉여가 그다음 층으로 폭포처럼 흘러내려, 마침내 다시 솟구쳐 오르는 그 수조(水槽)로 되돌아오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은혜 — 부요하신 분이 가난하게 되심

이제 자신의 논증의 결정적 분기점에서, 바울은 그 유명한 그리스도론적 근거(christological warrant)에 호소하며 이 헌금 전체를 그리스도 사건에 정초시킵니다.

너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마치 상류를 바라볼 때, 우리는 단지 일반화된 신적 너그러움의 관념만이 아니라 하나의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행위 —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자기 내어주심(self-giving) — 를 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카리스)」로 표현되어 있고, 바울의 유명한 이중 참여(double participation) 공식 가운데 하나로 풀이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처지에 참여하시어 — 「부요하신 이로서 가난하게 되사」 —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처지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 — 「그의 가난함으로 너희가 부요하게 되게 하심」 입니다.

여기 요약된 이야기는, 그리스도가 죽음에까지 이르는 연약함과 취약함을 지니고 인간이 되신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부요하신 이로서 가난하게 되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방금 마게도냐 교인들의 너그러움의 부요함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저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자기 내어주심의 부요함으로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요하시기에 — 부요하셨음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자기 내어주심에 부요하셨기에 — 그분은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헬라어를 아시는 분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저는 이 헬라어 분사를 양보적[concessive]이 아니라 양태적[modal]으로 봅니다.) 그분의 부요함, 곧 자기 내어주심의 부요함 가운데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가난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자기 내어주심은 그분의 성육신과 죽음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건의 여파 속에서, 그리스도 안으로의 참여를 통해 자기 내어주심에 부요하게 됩니다. 바울에게 은혜의 이야기는 그리스도라는 선물 안에서 가장 응축되고 가장 완전한 형태에 다다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하나님은 어떤 것 — 창조처럼 아무리 위대한 것이라도 — 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베풂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안에서 함께 나누는, 시간 속의 그 결정적 순간으로부터 솟아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우리가 본받는 모범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나누는 그 은혜의 원천(wellspring)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베풂은 시간을 초월한 추상적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규정적 사건(defining event)을 메아리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찬(주의 만찬)에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기억할 때마다 뒤돌아보는 바로 그 사건입니다.

명령의 윤리도, 모방의 윤리도 아닌 — 참여의 윤리

바울이 여기서 그려 보이는 것, 곧 헌금이라는 이 본보기적 윤리 활동(paradigmatic ethical activity), 이 선행은 명령의 윤리(ethic of command)가 아닙니다 — 우리가 명령에 복종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비록 순종이 더 큰 무언가의 한 성분이긴 하지만). 또한 이것은 모방의 윤리(ethic of imitation)도 아닙니다 — 우리가 너그러움이나 은혜에서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혹 여기에 모방의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훨씬 더 충만한 무언가의 일부입니다. 그것은 곧 참여의 윤리(ethic of participation), 감사의 윤리, 은혜의 신적 역동성에 의한 인식과 재구성의 윤리입니다. 그 은혜는 우리 앞에 있고 우리를 넘어서 있지만, 우리를 그 흐름 속으로 쓸어 담아 우리의 일부가 되고, 그 과정에서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비록 바울이 이 장들에서 성령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여기에 있는 구조는 다른 서신들에서 발견되는 것과 동일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 만일 우리의 새 생명이 성령의 형태로 임한 하나님의 생명에 의해 빚어지고 활력을 얻었다면 — 「성령을 따라 행할지니」, 특히 성령의 열매를 나타냄으로써 그리하라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5장). 바울의 서신들이 명령을 담고 있고 모범을 사용하긴 하지만, 그 바탕 구조는 선물의 윤리(ethic of gift) 입니다 — 우리가 받은 것을 전달하는 것, 받은 자원을 나누는 것, 하나님의 한없는 자기 내어주심에서 솟아나는 경계를 허무는 너그러움입니다. 우리 행위의 주도권과 능력과 질(quality)은 이미 운동 가운데 있습니다. 여기에는 일종의 기쁨, 혹은 낙관이 있습니다 — 우리의 행위가, 증여자인 우리가 참여하는 특권을 누리는 하나의 우주적 경제(cosmic economy)의 일부라는 기쁨 말입니다.

하류를 바라보다 — 은혜의 변화시키는 효력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일어나는 그 은혜의 근원인 상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시냇물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갑니까? 그 흐름에 들어서서 물살을 따라 헤엄치는 것은, 우리가 은혜의 선물로 유익을 끼치는 이들에게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여러 지점에서 보았듯, 바울은 부요하게 됨(being enriched)을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은혜는 「그의 가난함으로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는 것이었고, 이 부요함은 — 앞서 보았듯 — 단지 더 많이 갖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뒤에서 그는 고린도 교인들이 온전한 일편단심을 위해 모든 면에서 부요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상하지만 중요한 역설에 의해, 여기서 증여자들은 고갈되거나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부요해지고 커집니다. 그들은 자라고, 발전하고, 베풂에서 늘어납니다. 그런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방식으로 일어납니까?

첫째, 코이노니아 — 상호적 동반 관계의 형성

성장의 한 형태는 여기서 지나가는 말로만 언급하겠습니다(다음 강연에서 다시 다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부요해짐은 부분적으로, 그들이 예루살렘 신자들과 발전시켜 가는 사회적 동반 관계(social partnership)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 장들에서 바울은 두 번이나 이 헌금 프로젝트를 코이노니아(koinōnia)라 부릅니다 — 우리가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이지요. 그것은 동반 관계나 우정처럼, 둘 이상의 당사자를 함께 묶어 주는 무언가를 공유함(having things in common)을 뜻합니다. 영어에서 예전에는 이 단어를 'fellowship(교제)'으로 번역했지만, 저는 그 말이 이제 다소 낡았다고 생각하여 partnership(동반/협력) 혹은 solidarity(연대) 같은 단어를 선호합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이것은 한 무리의 교회에서 다른 무리의 교회로 가는 일방적 선물이 아니라, 교회들 사이의 상호적이어야 할 동반 관계의 표현 혹은 발전입니다. 바울이 말하듯,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채움은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채워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잉여는 양방향으로 흐르도록 기대됩니다. 이 상호성이 어떻게, 언제 일어날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 어쩌면 그것이 요점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우정의 상호 헌신 안에서는, 필요가 어떻게 언제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상호성을 향한 헌신이며, 그것은 지속되도록 의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여자들에게 변하는 한 가지는, 선물이 의도한 목적을 이룬다면, 새로운 친구, 새로운 동반자, 새로운 후원자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뒤에서 예루살렘 신자들이 「너희를 사모하고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리라」고 말합니다. 바울에게 기도는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불러오는 강력한 방식입니다. 그러니 마게도냐와 고린도 교인들은 적어도 기도의 동반자를 — 그리고 장차 그들의 필요가 일어날 때 아마도 그 이상을 — 얻게 될 것입니다.

둘째, 마음으로부터 — 강요되지 않은 베풂

다음 강연에서 이 주제를 더 다루겠지만, 지금은 그 흐름에 들어서서 그 안에서 헤엄칠 때 일어나는 내적 변화(internal transformation)의 한 형태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바울에게는, 그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요청하는 베풂이 그들에게서 억지로 짜낸 것이 아니라는 것, 곧 강제나 순전한 요구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이 장들에서 그가 그들에게 어찌나 압박을 가하는지, 그들의 베풂이 외적 강제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장들을 일종의 '팔 비틀기(armtwisting)'라고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베풀라고 강요할 권력이 없습니다. 설령 그에게 그런 권력이 있었다 하더라도, 강요는 요점 자체를 파괴할 것입니다. 바울에게 베푼다는 것은 베풀기를 원하는 것(to give is to want to give)입니다. 의지, 곧 그가 마음(heart)이라 부르는 것이 베풂에서 결정적입니다. 9장에서 그가 하는 말에 주목해 봅시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둡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마음으로부터 베푸는 것이 바울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가 베풂의 행위를 자기 자신을 연루시키고 자기 자신의 방향을 정하는 행위(self-involving and self-orienting)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의 과정 — 삶 전체의 변화의 과정 — 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제 시냇물 은유를 계속하자면, 우리는 그저 은혜의 시냇물을 따라 수동적으로 떠내려가며 아무 관여 없이 물살에 실려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 물살 속에서 헤엄침으로써 능동적으로 참여합니다.

'마음'이라는 단어는 바울에게서 많은 것을 아우릅니다 — 우리의 기본적 사고방식, 삶의 태도, 욕망, 성향, 그리고 정서까지. 이 모든 것이, 자아를 깊은 차원에서 신적 선물의 형상으로 다시 빚어내는 그 은혜의 흐름에 합류함으로써, 변화되고 풍성해집니다.

100% 하나님의 은혜, 동시에 100% 우리의 베풂

이제 여기에 하나님의 행위(은혜 안에서)와 우리의 행위(베풂에서, 심음에서, 자아와 마음을 우리가 참여하는 행위에 바침에서)가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행위는 우리의 행위와 어떻게 관계됩니까? 정말로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하고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속하지 않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인간의 행위와 같은 종류의 행위자(agent)로, 그리고 같은 인과(因果)의 평면 위에 있는 분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행위와 우리의 행위를 서로 경쟁 관계로 말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 식으로 읽으면, 더 많은 베풂을 하나님께 돌릴수록 우리에게 돌아갈 몫은 줄어들고, 우리에게 더 많이 돌릴수록 하나님께 돌아갈 몫이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이 여기서 하는 말과 맞지 않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바울은 마게도냐 교인들의 베풂을 하나님의 은혜에 돌렸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또한 똑같은 강조로, 그는 마게도냐 교인들 자신의 일편단심의 헌신과 열정, 심지어 그들의 선택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선물은, 말하자면 100% 하나님의 은혜인 동시에 100% 그들의 베풂입니다. 일부는 이쪽, 일부는 저쪽이 아닙니다.

바꾸어 말하면, 토마스 아퀴나스와 더불어, 또 현대 신학자 캐서린 태너(Katherine Tanner)와 더불어, 우리는 여기서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비경쟁적 초월(non-competitive transcendence)이라 부르는 것과 마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베풂 배후에, 또 그 앞에 계시며, 그 안에 현존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베풂을 축소시키거나, 증여자로서 우리의 역할과 책임에서 우리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또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분의 베풂에 참여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이것이, 「복으로 심는 자는 복으로 거둘 것이며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바울의 말을 읽는 가장 좋은 틀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저 같은 개신교인은 이 지점에서 조금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거두기 위해 심는 것은 분명 아니지 않습니까? 또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거둘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물질적 이득의 약속과 함께 물질로 베푸는 일종의 번영 복음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보십시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어떤 형태의 외적 보상(extrinsic reward) — 베풂의 대가로 우리가 얻는 어떤 것 — 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운동 속으로 더 온전히 들어설 때 일어나는 자아의 내적 충만, 확장, 깊어짐(intrinsic fulfillment)입니다. 그것은 증여자가 베풂 속에서 풍성해지고 충만해지는 것, 곧 하나님의 사랑을 점점 더 깊이 경험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 속으로 더 멀리 들어갈수록 — 하나님이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는 이유는, 마음이 베풂에 온전히 관여된 사람이, 자기 자신에 이기적으로 몰두하여 마음이 닫힌 사람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누리기에 더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베풂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것을 더 많이 받도록 우리를 돕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더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가 더 되기 위해(to become something more) 심습니다.

성령이 이루시는 변화는 우리를, 이를테면 우리 자신의 더 나은 판본(better versions of ourselves) 으로 만듭니다 — 하나님의 목적에 더 깊이 통합되고, 하나님의 사랑에 더 온전히 조율되며, 이 생에서 하나님의 복을 알고 누리기에 더 준비되어 장차 올 생을 향해 채비된 사람으로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공로로 얻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서 더 풍성하고 충만하게 표현되는 그런 사람이 되어 가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이 마게도냐 교인들의 베풂에 대해 언급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그다음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8장).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베푸는 것은 동시에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 — 자신의 의지와 자원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사랑에 조율시키는 것 — 입니다. 그것은 그들을 변하지 않은 채로 두지 않습니다. 그것은 삶 전체의 변화의 여정의 일부입니다 — 바울이 고린도후서 다른 곳에서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진다」고 부르는 것 말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 자신을 단지 하나님의 은혜가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는 도관, 곧 파이프로 — 마치 우리가 비인격적인 파이프나 통로에 불과한 것처럼 — 생각하는 것은 충분치 않습니다. 은혜의 흐름에 합류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변화되고, 치유되고, 정화되고, 풍성해집니다. 이 생에서 온전히 또는 완전히 그리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실제적인 효력이 없지 않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선물

호소의 맨 끝에서, 바울은 놀라운 음조로 — 감사의 기도로 — 마무리합니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바울이 독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로 은혜의 운동을 완성하도록 초대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흥미로운 것은 말에서 침묵으로의 이행(the movement from words into silence)입니다 — 「형언할 수 없는 선물(indescribable gift).」 여기서 묘사된 것이 동시에 묘사를 넘어선다는 감각, 인간의 지식과 언어의 범위보다 더 깊다는 감각이지요. 마치 우리가 헤엄치는 그 물살이 우리를 저 광대한 대양 속으로 — 우리 여정의 끝이면서 동시에 은혜의 근원인 그 바다로 — 데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의 베풂이 우리를 하나의 초월적 신비 속으로 끌어들임을 알립니다. 그것은 인간의 선물 주고받음을 떠올리게 하지만, 동시에 그 자체로 붙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신적 선물이 불러일으키는 것은 경이와 경외(wonder and awe)의 감각이며, 우리는 그것을 예배 속에서 표현합니다 — 비록 부족한 말을 사용하는 만큼이나 자주 침묵으로 잦아드는 그런 예배이지만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 은혜에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이가 있어서, 그것을 탐구하고 누리는 데 영원이 다 걸릴 것입니다.

맺으며 — 상류와 하류를 함께 바라보는 윤리

우리는 윤리 체계와 윤리 구조가 곳곳에서 무너져 내리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경쟁하는 윤리 체계들이 합의를 어렵게 만드는 다원적·다종교적 상황에 관한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물려받은 종교적 유산이 점점 얇아지는, 한때 종교적이었던 문화들의 세속화(secularization)가 심화되는 것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서구에서 하나님에 대한 어떤 참조도 없이 윤리를 원리 위에 정초하려던 시도는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순전한 힘으로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면, 왜 윤리적이어야 하는가? 다른 이들이 당신의 수고를 고마워하지 않거나 무엇이 자신에게 좋은지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왜 그들의 유익에 자신을 헌신해야 하는가? 설령 머리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안다 하더라도, 선을 행할 힘과 인내와 의지와 욕망을 무엇이 당신에게 주는가?

그럼에도 점점 더 많은 세속 사상가와 철학자들이 세속주의의 불충분함을 깨닫고 있으며, 그들은 감사의 윤리(an ethic of gratitude)로 돌아서고 있습니다 — 우리가 거하는 세계, 곧 자연의 세계, 예술과 음악과 문학의 세계가 지닌 선물성(giftedness)에 응답하면서 말입니다. 사랑의 경험, 생명의 순전한 약동은 우리를 부르며 우리의 응답을 불러일으키는 듯합니다.

사회학자 하르트무트 로자(Hartmut Rosa)가 그 한 예입니다. 비종교적 입장에서 말하면서도 그는, 우리의 삶이 선물로 해석된 주위 세계와 어떻게 공명(resonate)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로자에게 우리 몸의, 다른 사람들의, 예술과 음악의, 자연 세계의 실재(reality)는 선물 혹은 은혜와 같습니다 — 다른 곳에서 우리에게 와서, 우리에게 일어나고, 우리에게 베풀어지며, 우리를 응답으로 부르지만, 언제나 우리가 통달할 수 있는 능력 너머에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이 세계 속 우리의 자리가 전적으로 우리 자신이 만들거나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감각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넘어선 실재와 조율될 때 번성하며, 응답 가운데서 우리의 충만을 발견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명료함과 확실성과 정서적 능력을 부여받습니다. 우리가 응답하고 있는 대상은 자의적이거나 도덕과 무관한 무언가가 아닙니다. 우리는 만물의 의지와 안녕(well-being)을 향하시는 하나님께 응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물의 은혜와 아름다움은, 그리스도라는 선물 안에서 결정적으로 실연(實演)된 하나님의 자기 내어주시는 사랑에 닻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인간 역사가 뒤로 가는 듯 보이든 앞으로 가는 듯 보이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목적이 끝내 승리하리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았듯, 기독교 윤리의 천재성은 상류와 하류를 동시에 바라본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의존하는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봅니다 — 그것도 우리의 의지를 작동시키는 일회적 시동 장치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을 떠받치고 활력을 불어넣는 강물의 힘, 에너지, 물살로서 바라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행위는 언제나 기도를 동반하며, 우리의 성취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새겨집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힘으로 헤엄치지 않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를테면 하류를 바라보며 헤엄치고, 그 움직임의 과정에서 변화됩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더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가 더 되기 위해 여정 위에 있습니다 —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를 점점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는 하나의 모양(shape), 갈망, 목표가 있으며, 그것은 이 생을 가로질러 죽음 너머 영생에까지 뻗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 물론 그들 자신을 위하여 그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더 나은 판본, 곧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의도하신 더 많은 것, 그리스도 안에서 한 인간이 될 수 있는 바의 더 온전한 판본이 되어 갑니다.

그것이 실제로 어떤 모습일지는, 이 시리즈의 다음 두 강연에서 함께 탐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