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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언더우드 국제심포지엄 · 새문안교회

자선인가 연대인가

타자를 위하여, 또 타자와 함께 주는 것

두 번째 강연 (Charity or Solidarity: Giving Both For and With the Other) · 2026년 5월 30일

존 바클레이 교수의 두 번째 언더우드 강연. 첫 강연이 은혜와 인간의 선물이 맺는 관계, 곧 윤리의 구조를 다루었다면, 이 강연은 빌립보서를 사례 연구로 삼아 「우리가 베풂을 어떻게 빚어내는가」를 묻는다. 그 답으로 그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자선(charity)이 아니라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연대(solidarity)의 모델을 제시한다.

방금 들으신 대로, 저의 두 번째 강연 제목은 「자선인가 연대인가 — 타자를 위하여, 또 타자와 함께 주는 것」입니다. 지난 강연에서 기독교 윤리의 구조를 살피며 우리는 예루살렘 헌금에 동참하라는 바울의 호소에 초점을 맞추었고, 이는 신적 은혜와 인간의 선물 사이의 연결을 생각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과 함께, 우리가 베풂을 어떻게 빚어내는지(how we configure giving)를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보려 합니다. 이 문제에 관해 바울은 우리를 놀라게 할 만한,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자원이 될 만한 말을 가지고 있기에, 저는 그의 빌립보서를 사례 연구로 삼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그의 몇몇 핵심 전제를 우리의 전제와 대조해 보고자 합니다.

베풂의 모델 —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자선

우리는 자선 혹은 박애(philanthropy)를, 한 방향으로 행하는 것이 가장 좋은 위에서 아래로의 관계(top-down relationship)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것이 위에서 아래로인 이유는, 우리가 생각하는 자선이란 더 부유한 자가 더 가난한 자에게, 넉넉한 자가 부족한 자에게, 풍족한 자가 결핍된 자에게 베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느 차원에서는 이것이 말이 됩니다. 베풀 만큼 가진 자라야 베풀 수 있고, 당신이 줄 수 있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위에서 아래로의 선물에 담긴 위계 구조는 너무도 쉽게 증여자와 수혜자 사이의 영속적이고 지속적인 조건으로 굳어지며, 받는 쪽에 있는 이들에게 결코 유익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영속적인 위계 관계 속의 선물이 어떻게 그 수혜자를 비하하고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지, 여러분도 분명 잘 아실 것입니다. 늘 받기만 하고 결코 스스로 주지 못하는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시혜의 대상으로 취급받고, 모욕당하고,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의 베풂이 치르는 대가는 바로 수혜자의 존엄(dignity)입니다. 그런 관계의 권력 격차는 대개 그 베풂이 일방적임을 뜻합니다. 어떤 상호성도 가능하지 않고, 어떤 되돌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순수한 선물'이라는 서구의 이상

이것은 「순수한 선물(pure gift)」이라는 서구적 관념이 우리의 사고에 영향을 미칠 때 특히 흔해졌습니다. 우리가 들어 온 바로는, 순수한 선물이란 되돌려 받을 기대 없이 주어지는 선물,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오직 수혜자의 유익을 위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것이 순수한 이유는 바로 사심이 없고 되돌림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은 대부분의 문화에서 통용되는 베풂의 관념이 아니며, 우리 성경 저자들이 살던 문화에서는 확실히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몇 가지 이유로 서구의 이상이 되었습니다. 경제적 교환은 분명히 양방향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돈을 주면 당신은 내게 물건을 줍니다. 서구의 우리는 인격적 관계를 비경제적인 것으로 분리하여 이상화했고, 그것을 곧 비교환(non-exchange)을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당신에게서 교환을 통해 물건을 사지만, 당신에게는 되돌릴 수 없는 순수한 선물로서 무언가를 준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서구의 눈에는 일방적 선물이 합당한 선물이 되고, 되돌림과 상호성과 선물 교환은 의심의 먹구름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듣습니다 — 자선은 사업이 아니다, 인격적인 것은 상업적인 것이 아니다, 베풂은 교환이 아니다. 되돌림을 기대하는 베풂은 물론 일종의 뇌물이 될 수 있기에 위험할 뿐 아니라, 서구의 모델에서는 그것이 선물을 비하하고 부패시킨다고까지 여겨집니다.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일방적으로라는 이 자선의 쌍둥이 이상화가 어떻게 서로를 강화하는지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효과가 어떻게 문제적일 수 있는지도 보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도움이 상처가 될 때(When Helping Hurts)』라든가 『해로운 자선(Toxic Charity)』 같은 제목의 책을 쓰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식의 베풂은 증여자에게는 매우 만족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증여자의 우월감과, 사심 없어 보이고자 하는 욕망을 강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되돌려 줄 존엄과 능력을 빼앗긴 수혜자를 위축시키고 비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행위의 능력과 권력이 온통 한쪽에만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장기적으로 그 관계는 점점 더 불평등하고 소외적인 것이 되어 갑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베풂은 증여자와 수혜자를 서로 갈라놓을 수 있습니다.

저는 어떤 부유한 교회들이 더 가난한 교회에 해마다 위에서 아래로의 일방적 방식으로 베풀다가, 마침내 그 가난한 교회가 제발 그만해 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른 경우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선물에 짓눌렸던 것입니다(crushed by the gift).

성경의 베풂은 일방적인가

성경의 독자로서 우리는 이 자선의 모델을 성경 본문에 투사하여, 베풂이 이상적으로 이런 종류의 것이라고 가정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베풂은 정말 일방적일까요?

우리는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자기에게 주는 자에게만 주지 말고 이방인과 원수까지도 베풂의 범위 안에 포함하라고 권하신 것을 압니다(마태복음 5장, 누가복음 10장). 이것은 분명 되돌려 받지 못할 위험을 무릅쓰고 베푸는 것을 뜻하며, 누가복음 14장의 가난한 자와 저는 자와 맹인을 위한 잔치처럼 어떤 경우에는 물질적 되돌림이 있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베푸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조차 예수께서는 또 다른 종류의 되돌림을, 사실은 더 크고 더 좋은 되돌림을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라. (누가복음 6장) 너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갚음을 받겠음이라. (누가복음 14장)

예수의 이 가르침은 베풂의 범위를 넓혀, 통상적인 상호성의 범위 너머로 그것을 확장하도록 설계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상호성의 논리 자체를 폐기하거나 일방적 선물을 이상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것이 단지 무언가를 되받아내려는 장치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되돌림을 노린 베풂은, 노골적인 뇌물은 아닐지라도 조종(manipulative)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물이 오직 되돌림이 없을 때에만 선한 것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안적 모델이 있을까요?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성경의 자선은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일까요? 분명 성경에는 가난하고 굶주리고 병들고 집 없는 이들을 돌보라는 가르침이 풍성히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도움을 베푸는 이들이 그 자신은 물질적·사회적으로 안정된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됩니다. 현대 신약학은 고대의 후원자 혹은 시혜자(benefactor/patron)라는 인물 — 높은 곳에서 명예와 존경과 정치적 지위를 대가로 타인의 유익에 기여하는 엘리트적 우월한 신분의 사람 — 에 고착되어 왔습니다. 이런 부류는 고대 세계의 비문(碑文)에 잘 드러나 있고, 우리는 신약의 베풀라는 가르침을 읽을 때 본문이 염두에 둔 것이 바로 이런 부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곧 보게 되듯, 또 다른 모델이 가능하며, 그것은 대부분의 초기 그리스도인이 살아간 실제 현실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그것은 곧 대략 비슷한 사회적 지위에 있는 이들 사이의 균등화하는 상호성(equalizing reciprocity)의 모델입니다. 우리의 자동적인 가정을 경계하고, 여기 본문 — 바울 서신 — 에 주목하여 그것이 이런 문제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지 들어 봅시다.

연대 — 하나님의 선물을 서로 나눔

지난 첫 강연에서 지나가듯 언급했으나 더 많은 논평이 필요한 한 본문에서 시작하겠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바울이 예루살렘을 위한 헌금에 관해 고린도 교인들에게 편지할 때, 그는 그들에게 스스로 가난해지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들의 넉넉한 것에서 베풀라고 요청한다고 안심시켰습니다. 그가 한 말은 이렇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같이 — (출애굽기 16장 만나 이야기를 인용하며) —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본문에는 인상적인 점이 많습니다. 이는 바울이 균등(equality), 곧 헬라어 이소테스(isotēs)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매우 드문 경우 중 하나이며, 그는 여기서 그것을 두 번이나 사용합니다. 또한 그는 만나 이야기에 대해 주목할 만한 해석을 제시합니다 — 만나가 균등하게 거두어진 것을, 신적 배치(divine arrangement)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재분배(human redistribution)의 문제로 본 것이지요. 잉여를 거둔 자들이 충분히 갖지 못한 자들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바울이 여기서 고린도와 예루살렘 사이의 잉여 분배를 양방향으로 가는 것으로 묘사한다는 점입니다. 너희의 넉넉함이 그들의 부족함을 위하여, 또 그들의 넉넉함이 너희의 부족함을 위하여. 우리는 이것이 한 방향으로 가리라고 예상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잉여 가운데 있고 예루살렘 신자들은 궁핍 가운데 있으니까요.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양방향으로 가기를 기대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신자들이 언제, 어떻게 되갚을 수 있을지, 또 그들이 어떤 종류의 되돌림을 할지 말하지 않습니다. 곧 보게 되겠지만, 물질적 형편의 부침(浮沈)은 고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때는 잉여 가운데 있다가 다른 때는 궁핍 가운데 있다는 이 감각은 경제적으로 완벽히 합당합니다.

그러나 요점은 이것입니다 — 관계는 양면적이고 상호적이며 좋은 것들이 양쪽으로 오간다는 것이 바울의 기본 전제(default assumption)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끊임없는 움직임은 우리가 일종의 역동적 균등(dynamic equality)이라 부를 만한 것을 만들어 냅니다 — 한 방향의 불균등이 반대 방향의 불균등으로 상쇄되는 균등화 효과 말입니다. 여기에는 고정된 위계가 없고, 증여자의 권력이 먼저 한쪽으로, 그다음 다른 쪽으로 옮겨 다닙니다.

시소처럼 — 서로의 짐을 지라

이것을 보는 순간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이 으레 상호적 형태로 — 서로에게 이러저러하라는 형태로 — 주어진다는 것을 떠올리게 됩니다. 신자들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문안하고, 주의 만찬에서 서로 기다리고, 서로 존경하고, 서로 권면하고, 서로 세워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한 당사자가 다른 당사자를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서로를 떠받치고 섬기는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증여자이며 모두가 수혜자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갈라디아서 6장)

너희 중 일부가 다른 이들의 짐을 지는 것이 아니라, 너희 모두가 떠받침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할 자체가 위계적으로 보일 때 역설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하고 — 여기서도 서로(one another)입니다 —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서로 종노릇 하라」고 말합니다. 겸손과 자기 섬김은 본래 낮은 자에게서 높은 자에게로 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이 양방향으로 오가며, 각 사람이 상대방을 더 높은 신분으로 여깁니다.

이것을 시소(seesaw)처럼 그려 보십시오. 당신이 내려가면 상대가 올라가고, 상대가 내려가면 당신이 올라갑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사회적 관계라는 시소 위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놀이와 같아야 합니다. 누구도 자족적인 증여자로서 고정된 우월의 자리에 있지 않고, 누구도 늘 낮은 자리를 차지하는 수혜자가 아닙니다.

코이노니아 — 연대의 신학

이런 상호성을 가리켜 바울이 쓰는 단어는, 지난 강연에서도 언급한 코이노니아(koinōnia)입니다. 이것은 고대에 상호성 혹은 연대의 사회적 관계 — 무언가를 공유하고 서로 돕기로 헌신하는 관계 — 를 가리키는 데 널리 쓰인 단어입니다. 「펜타 코이나 필론(친구는 모든 것을 공유한다)」이라는 고대 격언이 있습니다. 이것이 반드시 재화를 한데 모아 공동의 솥에 넣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사도행전 2장과 4장의 초기 교회에서 보듯 어떤 상황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만 말이지요. 더 흔히 그것은 짐을 나누고, 필요가 생길 때마다 서로 떠받치기로 하는 헌신을 뜻했습니다. 결혼 안에서든, 친구 사이든, 사업 동업자 사이든, 시민들 사이든 말입니다.

교제(fellowship), 동반(partnership), 공동체(community) — 이 모두가 코이노니아의 가능한 번역입니다. 다만 저는 가능하면 연대(solidarity)라는 단어를 선호하는데, 그것이 코이노니아에 깃든 하나 됨의 감각을 잘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여러 층위에서 작동할 수 있는, 열려 있는 상호적 헌신을 시사합니다. 그것은 시간에 걸친 상호성을 기대하되, 오가는 것을 일일이 세거나 재려 들지 않습니다.

시간이 더 있다면, 우리는 이것을 고린도전서 12장과 로마서 12장, 에베소서 4장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바울의 이미지로 분명히 예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몸의 모든 지체는 줄 수 있는 능력과 받아야 하는 필요로 인해 서로 묶여 있습니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느니라.」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이 본문은 강한 연대의 진술로 끝맺습니다 — 만일 한 지체가 고통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두가 함께 기뻐합니다. 어떤 지체도 홀로 갈 수 없습니다. 모두가 함께 번성하지 않는 한 어떤 지체도 번성할 수 없습니다. 오직 당신만의 배타적인 유익을 돌보는 것은 몸의 나머지를 해칠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당신 자신에게도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의 유익은 공동선(common good) 안에 박혀 있고, 모든 이의 이익이 또한 당신의 이익입니다.

선물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 선물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점입니다. 당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눌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당신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와 예루살렘 사이를 오가는 선물이 은혜의 표현 — 그들 자신의 의지 속에 빚어져 그들의 베풂으로 표현된 신적 선물 — 이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온갖 종류의 선물을 나누는 일이 의미를 갖는 까닭은, 공동선의 기원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물을 차등적으로(differentially) 주시는 것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으십니다 — 이 사람에게는 이것을, 저 사람에게는 저것을. 바로 그것들이 다른 이들에게 기여되어 사람들을 사랑으로 묶을 수 있게 하시려는 것이지요. 만일 하나님이 모든 선물을 한 사람에게 주셨다면 그 사람은 자족적인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몸은 그렇게 설계되지 않았습니다. 고대의 모두가 알았듯, 또 한국에 계신 여러분이 아주 잘 아시듯, 선물은 사람들을 함께 묶습니다(gifts tie people together). 선물은 이상적으로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서로 잇는 인격적 유대를 만들어 내거나 발전시킵니다. 바울이 가리키는 바, 신적 선물은 단지 전달(passed on)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돌아가며(passed around) 나뉘어야 하며, 그렇게 돌아가는 가운데 사랑의 유대를 길러 냅니다.

고대에 몸의 은유는 사회적으로 우월한 자의 신분을 보호하는 데 동원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용법에 맞서, 몸 안에서 하나님은 더 약하거나 사회적으로 낮은 지체에게 더 큰 존귀를 주신다고 주장하며 그 은유를 뒤집습니다. 다시금, 일종의 균등화하는 역동성입니다.

고대 그리스도인의 위태로운 삶

대체로 바울의 상호성과 호혜에 관한 가르침은, 고대 세계 대부분 사람들의 실제 삶 — 초부유층도 아니고 완전한 극빈층도 아니며, 한두 번의 위기로 곧장 빈곤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질 수 있는 일종의 위태로운 가난(precarious poverty) 속에 살아간 — 에 들어맞습니다. 고대 역사가들의 면밀한 분석이 우리를 더 정확하게 해 주었습니다. 바울의 회심자들 가운데 한두 번의 경제적 충격 이상으로 빈곤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대부분은 가난했고, 벼랑 끝 가까이 있었습니다. 비록 영구적인 극빈 — 곧 다른 이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벼랑 너머로 떨어진 상태 — 은 아니었더라도 말이지요.

고대의 삶은 끊임없이 위태롭고 변덕스러웠습니다. 부상, 질병, 죽음 하나가 한 가정을 즉시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었습니다. 흉작, 식량 가격의 폭등, 일자리 상실, 갑자기 집세를 올리는 집주인, 예기치 못한 지출, 위협과 함께 회수되는 빚 — 이 모든 위기가 비교적 위태롭던 한 가정을 극빈으로 떨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예기치 못한 위기가 일상이던 이런 불확실한 조건에서, 유일한 안전장치는 신뢰와 상호 헌신의 사회적 연결망(social networks)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완전한 극빈에 처한 이들은 그 사회적 연결망이 무너졌거나 도움을 줄 수 없게 된 이들이었습니다. 신약의 예를 떠올려 보십시오 — 누가복음 16장의 거지 나사로, 혹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그토록 홀로였기에 아무도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으려 했던 그 사람 말입니다.

고대의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생존하려면, 작은 호혜의 행위들이 신뢰의 관계를 세워 예기치 못한 비상시에 필요한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 서로 떠받치는 관계의 연결망을 짓고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음식을 나누거나 주는 것, 아이를 돌보는 것, 병자를 간호하는 것, 돈을 꾸어 주는 것, 연장을 나누는 것, 옷을 지어 주는 것, 손님을 대접하는 것 — 이런 것들이 바로 고대 비문에는 결코 기념되지 않았으나 대다수 사람들을 날마다 극빈에서 지켜 준 소규모의 행위들, 곧 선행이었습니다.

바울 자신도 고용이 불안정한 손기술 노동자(craft worker)였고, 그는 자기 회심자들 일부도 손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전제하며 편지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4장). 고린도 교회에는 비교적 부유한 구성원도 일부 있었을지 모르나, 거기서도 대부분은 부유하지도 권세 있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바울이 위에서 아래로의 자선이 아니라 상호적·호혜적 떠받침의 기풍(ethos)을 심으려 한 것은 충분히 합당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연대와 상호 인정, 곧 서로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감각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의 가장 흔한 모델은 후원자와 피후원자가 아니라, 한 가정(household)의 동료 구성원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바울의 단어는 후원(patronage)이 아니라 필라델피아(Philadelphia), 곧 형제자매 사이에 흐르는 사랑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4장).

빌립보서에 나타난 연대

이제 오늘의 주된 사례 연구라 약속드린 빌립보서로 향합니다. 연대는 이 편지의 처음부터 끝까지 핵심 주제입니다. 제가 연대로 번역하는 코이노니아와 그 동족어는 이 편지에 다섯 번 나오는데,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의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 안에서의 코이노니아」를 회상하는 첫머리의 감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또한 이 편지 곳곳에서 우리는 중요한 전치사 쉰(sun) — '함께(with)'를 뜻하며 헬라어 합성어 안에 들어가는 — 을 발견합니다. 서로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바울과 함께. 이 모든 관계가 쉰으로 특징지어지며, 이 비교적 짧은 편지에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무려 19번이나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제 이 연대를 세 차원에서 탐구할 것입니다 — 공동체 안에서의 연대,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리스도의 연대, 그리고 빌립보 교인들과 바울 사이의 연대입니다.

첫째, 공동체 안에서의 연대

빌립보서 2장에서 공동체를 향한 바울의 가르침은 지금까지 우리가 본 것을 그대로 비춥니다. 그가 보고자 하는 것은 사랑으로 하나 된 「성령의 코이노니아」 안에 있는 공동체입니다 — 그가 강조를 위해 거듭 말하듯, 같은 마음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한마음으로(sumpsychoi), 뜻을 합하여 말입니다. 우리는 한 지체가 고통받으면 모두가 고통받고 한 지체가 기뻐하면 모두가 기뻐하는 그 몸을 다시 떠올립니다.

바울이 여기서 북돋우는 것은, 타인과 구별하여 자기를 규정하는 현대의 「완충된 개인(buffered individuals)」이 아니라, 관계가 상호적이고 자아가 공동선 안으로 내어지는 공동체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당파심(eritheia)을 경계하고 헛된 영광(kenodoxia)을 경계합니다 — 자아의 이익이 공동선에 맞서거나 그 위에 놓일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이지요. 빌립보 교인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그 가르침은 늘 그렇듯 상호적입니다 — 서로(one another). 이것은 타인을 위한 일방적 자기 비하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모두가 서로를 자기보다 위에 두려고 애쓰는 기풍입니다. 이것은 서로에게 종노릇 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금 그 가난한 자의 시소의 또 다른 판본이지요. 한 방향으로 흐르는 불균등이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불균등으로 뒤집힙니다. 각 당사자가 존귀를 주는 동시에 존귀를 받기에, 중요성의 고정된 위계도, 일방적인 권력 관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둘째,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리스도의 연대

빌립보서의 주목할 만한 특징은, 이 인간의 연대를 그리스도의 이야기 안에 정초시키는 동시에 그 이야기로 본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연대의 둘째 차원입니다. 아시다시피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빌립보서 2장의 저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Christ hymn)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이 어디서 왔는지 — 바울이 직접 썼는지, 다른 데서 이미 만들어진 것을 가져왔는지 — 에 관한 방대한 학문적 논의에 여기서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그것이 편지에 충분히 잘 통합되어 있어 여기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게 한다는 점만 말씀드립니다.

최근 수십 년의 경향은 이 찬가를 일차적으로 윤리에 관한 이야기로 — 바울이 주변 구절에서 말하는 겸손과 순종의 본보기로 그리스도를 두고 — 읽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찬가의 한 부분에서 윤리적 함의가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그 주된 역할은 그보다 더 깊은 무언가입니다. 여기 그려진 것은 무엇보다 도덕적 모범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의 구원의 드라마입니다. 물론 구원론(救援論)이 명시적으로 풀이되지는 않습니다 — 「우리를 위하여」라는 언급이 없지요. 그러나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 시인하는 마지막 장면은, 바울이 다른 곳(고린도전서 15장)에서 구원의 최종 막으로 그리는 우주의 재정렬(reordering of the cosmos)을 묘사합니다.

이 드라마의 첫 번째 하강 궤적(6~8절)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체에서 종의 형체로 옮겨 가는 움직임을 — 인간적으로 강력한 형태로 신적 권능을 사용할 능력을 스스로 비우심으로써 — 그립니다. 자기 이익을 취하기는커녕,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주심으로, 곧 나누심으로 하나님의 자기 내어주시는 성품을 드러내셨습니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자기 자신을 인간의 조건 속으로 내어주심으로 말입니다. 찬가의 두 하강 운동 사이의 경첩에서, 이 인간 되심이 강조되고 반복됩니다 —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인류와의 이 자기 동일시를 통해 그리스도는 인간 조건의 굴욕과 취약함을 죽기까지,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겪으십니다. 그러면서도 내내 그분은 하나님의 목적에 순종으로 매여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인간의 조건을 함께 나누고자 자기 자신을 인류와 함께 두신 이 심오한 일, 곧 우리가 인류와의 온전한 연대(full solidarity with humanity)라 부를 만한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예수께서 순종하신 그 구원의 목적을 이루시는 수단입니다. 그 목적은 셋째 단계, 곧 찬가의 상승 운동에 드러납니다. 하늘과 땅과 죽은 자들의 지하 세계에 이르기까지 존재 전체에 걸쳐 예수를 우주적 주권의 자리로 높이심으로써, 예수의 구원의 능력이 이를테면 만물에게 그 내부로부터 닿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자기가 돕는 이들의 취약함으로부터 자신을 차단한 채 멀찍이 위에서 아래로 베푸는 엘리트 시혜자의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 가운데로 와서 우리와 함께 사시는 이의 사랑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for us) 행하실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with us) 행하십니다.

우리의 조건에 대한 이 자기 낮추심과 자기 나누심의 참여야말로,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주(主)의 자리로 높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분의 부활의 능력과 우주적 즉위에 몫을 얻습니다 — 아니, 얻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 뒤에서 말하듯, 우리는 구원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그분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그 능력으로 우리의 낮은 몸을 변하게 하여 자기 영광의 몸과 같은 형체로(smmorphos) 빚으실 것입니다(빌립보서 3장).

사실 그리스도와의 이 나눔은 신자에게 이미 이 생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찬가를 분명히 메아리치며, 바울은 우리의 핵심어 코이노니아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sharing in Christ's suffering)을, 그리고 그의 죽으심과 같은 형체로 빚어짐(summorphizomenos)을 이야기합니다 — 그리하여 바울이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알게 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이야기에 참여한다는 감각이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뒤돌아보며 기념하는 과거의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삶 속에서 살아 내는 실재로서 말입니다.

참여 — 관중인가 선수인가

최근 바울 학자들과 신학자들 사이에서 참여(participation)에 관한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참여 혹은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이 바울 신학의 중심 모티프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었습니다. 그리고 루터와 칼뱅에 관한 최근의 연구는, 그들의 신학이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주장에 기대고 있음을 — 단지 그분의 사역의 수혜자에 그치지 않고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께 접붙여진다는 것을 —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나 참여에는 한 가지 이상의 방식, 한 가지 이상의 종류가 있습니다. 이것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축구에 빗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한편에는, 자기 팀의 성공에 참여하는 팬의 참여가 있습니다. 저는 토트넘 홋스퍼(Tottenham Hotspur)의 미적지근한 팬입니다. 손흥민이 그 팀의 왼쪽 날개였을 때 최고의 나날을 보냈던 그 토트넘 말이지요. 저는 팬으로서의 그런 참여를 조금 압니다. 팬은 자기 팀의 성공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축한다는 의미에서 그 성공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그 성공은 그들을 위하여, 그들에게 이루어진 것이지, 경기장에서 응원한다는 것 말고는 정말로 그들과 함께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함께 뛰는 선수가 되어 경기장 위에서 경기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훨씬 더 깊은 종류의 참여일 것임은 분명합니다.

물론 바울에게 십자가의 승리, 죽음을 이긴 승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이미 쟁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단순한 관중이 아니며, 이 승리의 단지 수동적인 수혜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스스로 경기장 위 드라마 안으로 들어섭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그렇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나 단지 너희를 위한 일이 아니라, 너희 안에서 또 너희를 통하여 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것은 너희 자신의 일도 포함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장)

여기에 우리가 지난 강연에서 이야기한 그 이중 행위(double agency)가 있습니다 — 하나님의 행위와 우리의 행위. 서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행위에 활력을 불어넣어 우리 또한 행하고 일하고 의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함께 뛰는 선수(co-players)로 참여하여, 그리스도가 순종하신 대로 순종함을 배우고, 그리스도가 겸손하셨던 대로 겸손함을 배우며, 그분의 승리가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효력을 내게 하고,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이 말하듯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우리에게 이으셨기에, 우리도 그분께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위대한 은혜의 연대 속으로 감싸여 들어갈 때, 우리는 그 은혜를 나누는 법을 — 우리끼리 주고받는 법을 — 배웁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하듯, 우리는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synkoinōnos)」, 곧 은혜의 동역자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사건에서 흘러나오는 은혜이며, 그 흐름 속에서 헤엄침으로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은 그 은혜를 서로 나누는 법을 배워,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나누는 연대 속에서 증여자이자 수혜자가 됩니다.

셋째, 빌립보 교인들과 바울 사이의 연대

이것이 빌립보서에서 발견되는 연대의 셋째 차원, 곧 빌립보 교인들과 바울 사이의 연대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이것은 바울이 편지 첫머리에서 인정하는 연대이며, 무엇보다 그들이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옥에 갇힌 바울에게 보낸 선물로 가장 두드러지게 형태를 갖춘 연대입니다. 바울은 옥의 더없이 비참한 형편 속에서 깊이 감사합니다. 음식이나 옷을 살 수 있도록 재정적 후원을 들고 찾아온 친구들의 방문은 분명 큰 위안이었습니다.

편지의 마지막 단락에서 이 선물에 대해 명시적으로 말할 때, 바울은 코이노니아의 주제로 돌아갑니다.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도다(synkoinōnēsantes).」 실로 그는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이 아직 그만큼 깊은 연대감을 발전시키지 못했던 고린도 교인들과 대조적으로, 주고받음의 오래가는 동반 관계에 보여 준 독특한 헌신 — 거듭된 재정 후원의 양상 — 을 칭찬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사용하는 재정적 언어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사업 동업(business partnership)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하는 일, 곧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실 공동 사업이 아닙니다. 코이노니아는 우리가 보았듯 여러 형태의 연대를 아우릅니다. 여기서 그것은 각 당사자가 서로에게 헌신하는 연대, 서로 다른 종류의 좋은 것들이 그들 사이를 오가는 연대를 뜻합니다. 주목할 것은, 바울이 이것이 일방적이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주고받음의 관계입니다. 돈 외에도, 그것은 방문과, 얼굴을 맞댄 만남에서 비롯되는 인격적 격려와 지지를 포함합니다 —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을 방문한 것, 바울의 대리인 디모데가 빌립보를 방문한 것, 그리고 바울이 머지않아 바라는 자신의 빌립보 재방문, 그가 그들을 자랑하고 그들이 그를 자랑할 그 방문 말입니다. 이 관계의 재정적 차원이 상호 돌봄의 정신 안에 박혀 있기에, 이것은 경제적 교환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인격적 교환은 분명히 있습니다.

편지의 그 마지막 단락에서 바울은 두 번이나 자신의 감사를 단서를 달아 한정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그가 사실 감사하지 않거나, 감사하다고 말할 형편이 못 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그 단서들은 그의 감사를 줄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와 빌립보 교인들 사이의 선물 관계를 하나님의 행위와 선물이라는 틀 안에 놓으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 너희가 나를 생각해 준 것을 기뻐하노라, 그러나 「나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고. 그는 마치 선물을 정말로 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것을 떨쳐 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설령 그들의 동반 관계가 자신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 줄 수 없었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자신에게 소중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인간의 관계가 물질적 차원에서 실패하더라도 바울이 결핍되지 않도록 힘을 주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결정적 현존(crucial presence)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은 단지 사회적 관계에 의미를 더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동반 관계의 근원이시며 동시에 그 안에서 순환하는 능력 혹은 은혜이시기에, 그 동반 관계 속 하나님의 현존은 인간 행위자들이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것을 넘어섭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 자신을 넘어선 자원을 길어 올리고 있으며, 이는 곧 선물 관계의 사회적 압박이 크게 줄어든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베풀고, 그들이 되갚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와 그들 모두가 자기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에 접속하고 있기에, 그는 그들에게 자신의 선물을 되갚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 뒤에, 또 그들 사이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도 자기 선물로 상대를 조종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은혜의 동역자이며,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을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만큼 순환시킵니다. 각 당사자는 존엄을, 곧 베푸는 자의 존엄을 지닙니다. 더없이 큰 존엄을 — 베풂 가운데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넘쳐흐른 그 은혜의 흐름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맺으며 — 자선을 넘어 연대로

이 강연에서 저는 자선(charity)보다는 연대(solidarity)에 더 가까운 모델을 논증했습니다 — 적어도 자선이 보통 그렇게 이해되듯 일방적이고 위에서 아래로의 관계로 이해된다면 말이지요. 저는 바울이 연대의 모델을 제시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것이 단지 그의 교회들의 사회적·경제적 조건에 들어맞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연대가 깊은 신학적 뿌리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사건 — 예수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 — 은 그 핵심에서, 우리의 인간 조건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의 위대한 연대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단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러 오신 것이지요. 그 목적은, 우리가 그 같은 은혜의 역동성에 —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연대 속에서, 그러나 또한 서로와의 연대 속에서 — 함께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베풂은 이상적으로 위에서 아래로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는 것은 사실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전달되어야 한다는 명백한 목적과 함께 우리가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증여자이기 이전에 먼저 수혜자(first receivers before we are givers)라는 감각으로, 권력의 역학은 변모됩니다. 그러나 그 베풂은 또한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주도록, 또 다른 이들에게서 받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디 자족적이지 않도록 설계되었기에, 베풂은 상호적이고 권력의 역학은 시소와 같습니다. 은혜는 우리를 그리스도께, 또 서로에게 묶습니다 — 우리가, 모든 사람이 다른 이들이 필요로 하는 무언가를 갖도록 차등적으로 분배된 한 선(善)을 함께 나눌 때 말이지요.

이 모델은 온갖 방향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저는 교회들 사이의 관계가 베풂이 온통 일방적일 때 어떻게 문제적이 되는지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영역에서도 이것을 탐구할 수 있습니다. 가령 국제 무대에서, 우리는 최근 수십 년 동안 어떤 형태의 원조나 자선이 깊이 문제적이고 무력화하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가장 좋은 모델은, 후원을 받는 이들이 무역이든 소액대출(microloans)이든 사업이든, 혹은 다른 형태의 존엄을 세우는 발전을 통해 자기 자신의 행위 능력을 발전시키고 확장할 수 있게 하는, 힘을 북돋우고 상호 유익을 주는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자선의 한계, 연대의 길 — 그리고 교회

그러나 이것이 지역 공동체나 국가적 차원에서 행하는 교회의 사회 사업에도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가리키며 마무리하겠습니다. 경험이 보여 주는 바, 자선 모델은 매력적이고 때로 처음에는 필요하기도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작동을 멈춥니다. 그것은 의존을 부추기고, 권력 격차를 강화하며, 끝없는 일방적 베풂의 흐름 속에서 교회의 자원을 소진시킵니다. 시간에 걸쳐 상호적 베풂의 형태를 발전시키는 방식이 훨씬 낫습니다. 공동체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회복력 있고 창의적이 되도록 힘을 북돋우고, 교회를 모든 것을 다 채워 주는 시혜자로 행세하게 하는 대신 동반 관계로 이끄는 방식 말입니다.

제가 아는 런던의 한 교회는 노숙인을 위한 사업을 운영했는데, 거리에서 잠자는 지역 주민들을 위해 매주 식사를 차려 주었습니다. 한 노숙인 남자가 매주 비스킷 한 봉지를 들고 와 거기 있는 모두에게 돌렸습니다. 그의 선물을 거절하기는 쉬웠을 것입니다 —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냥 가지세요. 본인이 드세요. 음식을 차리는 건 우리니까요."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그를 짓눌렀을지 여러분은 곧바로 아실 것입니다. 그는 베푸는 자가 되는 존엄, 무언가를 기여하는 존엄을 갈망했던 것입니다. 그 후 그 교회가 발전시킨 모델은, 한 당사자가 다른 이들을 위해 공급하는 무료 급식소(soup kitchen)의 모델이 아니라, 모두가 무언가를 — 음식이 아니면 어떤 종류의 섬김이든, 공동선에 대한 어떤 기여든 — 들고 오는 포트럭 만찬(potluck supper)의 모델이었습니다. 그 바탕 위에서 가난한 이들은 피후원자(clients)가 아니라 친구가 됩니다. 「가난한 자」라는 범주가 아니라, 이름을 가진 사람,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나란히 일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종류의 깊은 관여는 위에서 아래로의 자선 모델과는 거리가 멀며, 또한 실행하기에 훨씬 더 어렵고 더 많은 대가가 듭니다. 그러나 교회에게 이것은 단지 더 나은 사회 모델을 채택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복음의 진리에 맞추어 행하는 것, 곧 우리의 모든 선물 — 자연의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 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연대는 전도(evangelism)와 그토록 잘 어울립니다. 우리가 공유된 취약함 속에서 다른 이들과 친구가 될 때, 우리는 우리 모두를 떠받치시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 안에서 결정적이고 깊이 자기 자신을 우리와 나누신 그 하나님을 온전한 진실로 가리켜 보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