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진 자에서 연대하는 자로
부족한 사람을 이렇게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올해 제가 받은 최고의 선물은 바클레이 교수님께서 한국에 오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바클레이 선물」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리스도라는 선물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올해 제가 받은 최고의 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번 강연이 저뿐 아니라 많은 분들에게 생각의 자극을 주고, 마음과 행동을 바꾸는 유익한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고백을 하나 해야겠습니다. 저는 빚쟁이 인생입니다. 우선 은행 빚을 좀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갚으면 되니 별 채무감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를 가르쳐 주시고 사랑해 주신 분들에게 진 빚이 큰데, 특별히 바클레이 교수님께 너무 많은 빚을 졌습니다. 별 자격이 없는 저를 석사와 박사 학생으로 받아 주시고, 무사히 졸업할 수 있도록 꼼꼼하고 자상하게 지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좋은 학자가 되는 것으로 빚을 갚아야 한다」는 채무감이 늘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 채무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세 번의 강연을 통해 제 인생을 더 넓은 시야에서 조망해 보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 선물을 나누고 서로 유익을 나누는 관계를 성찰하게 되었고, 그 결과 채무감이 아니라 연대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가 받아온 선물을 생각하면서, 곧 상류를 바라보며 이 은혜의 더 깊은 근원과 흐름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또 진심과 전심으로 동역자와 학생들을 대하는 일을 통해 받은 선물을 흘려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채무감이 조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 혹은 선물이 나의 소유가 아니라 공공재(共公財)라는 사실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세 강연을 돌아보며
바클레이 교수님의 세 번의 강연은 은혜의 윤리, 혹은 선물의 윤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윤리」라는 표현보다 다른 단어를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윤리」라는 단어가 주는 딱딱하고 구조적이고 체계적일 것 같은 뉘앙스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어쩌면 그냥 「은혜 안에 사는 삶」, 「은혜가 순환하는 삶」, 「은혜가 이끌고 변혁하는 삶」이라 표현하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강연의 전체 제목처럼 말이지요.
첫째 강연 — 숨은 카리스 찾기
바클레이 교수님은 첫 강연에서 예루살렘 연보를 담고 있는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을 살피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넓게 조망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보통 고린도후서 8~9장을 헌금이나 연보에 관한 이야기로 이해합니다. 더 나쁘게는 돈이나 경제, 자선의 문제로만 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연보는 표면에 드러난 하나의 사건일 뿐이고, 그 심층에는 은혜의 동력, 은혜의 순환, 은혜 안에 사는 삶이 담겨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말씀에는 은혜받기 전이나 은혜받던 시점만이 아니라, 더 깊은 근원에서부터 그 이후의 삶까지도 담겨 있습니다. 곧 성도의 과거의 이야기도, 현재의 이야기도, 미래의 이야기도 이 말씀이 담고 있으며, 우리의 모든 이야기가 은혜의 흘러넘침 안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은혜는 언제나 가장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성도는 그 은혜의 흐름 — 곧 은혜의 동력 — 에 자신의 몸을 맡깁니다. 그 결과 성도는 은혜 혹은 선물을 서로에게 베푸는데, 그 일을 통해 단순히 상대방에게 유익을 끼칠 뿐 아니라 서로에게 관여하면서 깊은 유대감을 형성합니다. 더 나아가 성도의 내면은 이 베풂의 부요함으로 풍요로워집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해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과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이 은혜의 흐름을 성경 안에서 보고 싶으시다면,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 고린도후서 8~9장을 펴서 읽으십시오. 둘째, 「숨은 그림 찾기」를 하십시오. 8~9장에 숨어 있는 카리스(charis)를 찾으셔야 합니다. 처음에는 좀 어려우실 겁니다. 카리스가 은혜로도, 선물로도, 호의로도, 연보로도, 감사로도 번역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열 개를 찾으셨다면 숨은 그림 찾기에 성공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주제가 연보가 아니라 카리스, 곧 은혜·선물·감사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시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이 열 개의 카리스와 함께 8~9장을 다시 묵상하면, 이번에는 크고 작은 인클루시오(inclusio) — 처음과 끝에 같은 표현을 사용해 한 단락을 하나의 주제로 묶는 기법 — 가 보일 것입니다. 8장의 시작도 카리스, 곧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은혜이고, 9장의 마무리도 카리스, 곧 교회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카리스가 성도 사이에 흘러 다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카리스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와 성도 사이를 오가고, 결국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갑니다. 저는 이것을 「은혜가 춤을 춘다」라고 표현하기를 좋아합니다. 새문안교회도 은혜가 춤추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둘째 강연 — 코이노니아, 곧 "서로서로"
두 번째 강연의 주제는 코이노니아(koinonia), 곧 연대입니다. 가장 많이 오해되는 단어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코이노니아는 보통 한국말로 「교제」라고 번역됩니다. 그래서 예배 후의 티타임이나 식사 시간을 교제의 시간, 코이노니아라고 생각하기 쉽고, 가볍게 대화를 나눈 뒤 「우리 코이노니아 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클레이 교수님께서 빌립보서를 자세히 살피며 설명해 주셨듯, 코이노니아는 선물을 주고받으며 상호 유익을 누리는 깊은 연대에 가깝습니다. 더불어 이 선물의 주고받음은 적대 관계나 위계를 만드는 부담 같은 것이 아니라, 공동선을 이루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대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말 번역 「연대」보다 그냥 「서로서로」라고 표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실제로 빌립보서 안에 있는 표현입니다. (「연대」라고 하면 고려대 학생이 실망할까 봐 그러는 건 아닙니다. 그 미천한 농담에 웃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말 「연대」가 사실 이 코이노니아를 담아내기에는 아쉬운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제 「연대라고 하니 정확히 잘 모르겠다」는 질문이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만큼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라는 뜻이겠지요.
신약학자 니자이 굽타(Nijay Gupta)는 코이노니아를 「위험을 무릅쓰고 상대방의 삶에 관여하는 것」이라 말하는데, 여기에는 꼭 「서로서로」를 넣어야 합니다. 이 「서로서로」는 단지 함께 있음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상호 작용과 상호 유익이 어느 정도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서로 만났는데 힘에 불균형이 있거나, 대우에 차별이 있거나, 어느 한쪽만 유익을 얻는다면, 그것은 그냥 「서로」이지 「서로서로」가 아닙니다.
여기서도 여러분이 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빌립보서를 펴고 「서로서로」를 찾아보십시오. 그중 하나만 들려 드리겠습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입니다. 새한글 번역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도리어 서로 낮은 자세로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더 위에 있다고 여기십시오. (빌립보서 2장 3절)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서로」입니다. 놀랍게도 영어 번역 대부분은 이 「서로」를 번역하지 않습니다. 한글 번역이 꽤 위대하지요. 그제 바클레이 교수님과 그리스도 안의 참여에 관해 대화를 나누다가, 교수님께서 이 점이 참 이상하다고 — 여기서 「서로」가 중요한데 영어 번역은 이를 옮기지 않는다고 —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다행히 한글 성경은 대부분 「서로」를 잘 번역하고 있으니, 이 단어를 놓치지 마십시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한 기독교 윤리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기독교의 진리, 기독교의 말씀은 살아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속한 곳에서 — 가정에서, 교회에서, 어떤 다른 공동체에서 — 어떻게 하면 서로를 「서로서로」 경험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할 때, 빌립보서의 코이노니아와 「서로서로」라는 개념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만약 바울이 말한 코이노니아와 「서로서로」가 우리 교회 안에서 실현된다면, 세상 사람들도 「아, 교회가 참 멋있구나, 참 매력적인 곳이구나」라고 여길 것입니다. 이것이 특히 한국 교회에서 실현되기가 참 어려운 일인데, 만약 해낸다면 정말 훌륭하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강연 — 로마서를 읽으십시오
마지막 강연은 로마서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곧 공동체를 생각하는 방식에 관한 것입니다. 바클레이 교수님이 방금 강연하셨으니 이 요약은 넘어가겠습니다.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이번 강연을 들으셨다면 집에 가서 로마서 12장부터 15장을 한번 읽어 보시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16장까지 읽으신다면 더 큰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방금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다양하고 중요한 개념들이 16장 안에서 실제로 실현되었음을 여러분이 목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좌담 — 네 가지 물음
이제 교수님께 몇 가지 질문을 드릴 차례입니다. 함께 생각해 볼 만한 질문을 가져왔습니다. 사실 질문을 만드는 데 무척 힘들었습니다. 제가 이번 강연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클레이 교수님께도, 저에게도, 여러분에게도 유익한 질문을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첫째 물음 — 공동체 안의 윤리를 세상으로 확장할 수 있는가
정은창: 바울은 대체로 성도들에게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편입니다. 세 강연에서도 교수님이 바울 윤리를 재구성하기 위해 가져오신 예시 — 예루살렘 연보도, 빌립보서의 연대도, 로마서의 공동선도 — 는 대체로 공동체 내부의 윤리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재구성한 공동체 안의 윤리를 세상을 향한 윤리로 확장해 적용할 수 있습니까? 바울은 이 확장을 밀어붙입니까? 가능하다면 어떤 말씀에 근거합니까? 또 공동체 안의 윤리 구조가 그대로 적용됩니까, 아니면 어떤 수정이 필요합니까? 동시에, 그리스도라는 선물의 강물 안에 있는 사람과 그 밖에 있는 사람이 관계를 맺을 때, 그리스도인끼리 관계 맺는 것과 다른 점은 없습니까? 이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세상에서 무척 힘들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께 목회하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면 되는지」 제대로 답해 드리지 못한 아쉬움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무거운 짐을 교수님께 잠깐 토스해 드리려 합니다.
바클레이: 물론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은 서로 사랑하는 것, 곧 상호적 덕 세움(mutual edification)으로 서로를 세우는 「서로서로」의 사랑이 가능합니다.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을 향해서는, 저는 로마서 12장 — 바깥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본문 — 이나 데살로니가전서 같은 본문을 떠올립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5절을 보면, 바깥을 향해 더욱더 선을 행하고, 더욱더 덕을 쌓으며, 결코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섬기며 덕을 쌓으라고 말씀합니다. 모두의 선을 추구하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님께 사랑받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기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그들을 섬기고 사랑해야 합니다.
바울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베푸는 사랑과 친절의 선물이 교회 안에서 바라는 것처럼 보답받지 못할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사랑은 여전히 행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흘려보낼 때는 상호성이 성립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우리는 계속 그렇게 합니다. 그것이 가장 큰 다른 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의 선을 추구하는 까닭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우리의 최고의 모습이 되는 그 비전이 곧 가장 좋은 인간 존재의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비전은 「어떻게 독특한 공동체가 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가장 좋은 인간성의 형태가 될 것인가」입니다. 골로새서 1장을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이 그분 안에서, 그분에 의해 창조된 그분이며, 모든 인간이 그분을 향해 설계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담게 하심으로 인간이 다다라야 할 궁극의 목적, 궁극의 이미지를 완성하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핵심은 교회 안 사람과 교회 밖 사람을 가르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추구하며 가야 할 길입니다.
다만 비전은 모두가 공유할 수 있지만, 적용에서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그리스도인 간호사가 병원에서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비그리스도인도 만날 때, 같은 사랑이라도 적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환자와는 함께 기도할 수 있지만, 비그리스도인 환자에게 기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정치의 영역에서도, 그리스도인은 사회 전체의 번영 — 모두가 번영하는 비전 — 을 품습니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다른 이들은 그 비전을 온전히 공유하지 않을 수 있지만 일부는 공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공유되지 않는 지점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겹치고 공유되는 지점을 함께 나누는 편이 낫습니다.
둘째 물음 — 이상과 현실의 간극
정은창: 이상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은혜의 동력 안에서 서로 연대하고, 선물을 흘려보내고, 상호 유익을 추구하며, 결국 자아가 재형성되는 경험을 합니다. 그런데 현실로 돌아와, 더 구체적으로 고린도 교회와 로마 교회를 들여다보면 이와 반대되는 현상 — 더 솔직히 말하면 더 자주 실패 — 를 목격합니다. 바울 신학 안에서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은혜의 동력이 모자란 탓입니까, 우리가 은혜의 흐름에 발만 담그고 있어서입니까, 아니면 사탄·죄·죽음의 세력이 방해하기 때문입니까?
바클레이: 그렇습니다. 바울은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이상을 제시하지만, 자신이 말 거는 실제 공동체들에 실패가 가득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야기한 로마 교회의 판단과 갈등도 그 예이고, 먹을 음식이 있는 자들이 없는 자들을 모욕하며 주의 만찬을 기념하던 고린도 교회의 방식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은혜가 충분히 강력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바울의 회심자들이, 또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이해하고 받아들일 능력이 때로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을 준다」고 말한 이유도, 우리가 아직 하나님의 능력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편지를 쓴 이유는 바로 그들이 그 은혜를 더 많이 받고, 이해하고, 알아서 — 그의 표현으로 — 성숙해지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죄인이고, 여전히 죄의 유혹과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질문하신 대로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가 여전히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일 뿐 아니라 유한한 존재(mortal)입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도 약하며, 이 죽을 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바울이 마지막 때, 곧 종말을 이야기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이 그의 회심자들에게 던지는 물음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아직, 하나님의 은혜가 너희를 위해 의도하신 그 모든 것을 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평생의 여정입니다. 단번에 이룰 수 있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다다르기까지 평생 이루어 가야 할 성화의 과정입니다. 그러니 지금 미성숙하다거나 성숙하다고 단정하기보다, 예수님의 이미지를 따라 계속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종말론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셋째 물음 — 바울의 선물 윤리와 고대 선물 문화
정은창: 바울의 선물 윤리 이해와 고대 선물 문화에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습니까? 세네카를 비롯한 고대인도 선물 윤리를 이야기하며 선물의 순환, 관계 혹은 연대 형성을 말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엇비슷한데, 둘이 어떤 점에서 비슷하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 궁금합니다. 이 물음을 드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 공동체가 어떤 독특함을 가질 수 있는지를 묻고 싶어서입니다.
바클레이: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바울의 공동체 신학과, 세네카 같은 고대 철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선물·선물 교환·인간 번영의 관념 사이에는 많은 겹침이 있습니다. 그 철학자들도 무엇이 인간 사회를 가장 잘 작동하게 하는지 깊이 고민했고, 바울도 그것을 고민했으니, 그런 겹침은 당연합니다. 세네카도 선물을 교환하고 상호성을 말하며 도시가 충만하고 번성하기를 원했다는 점에서 분명 비슷합니다.
둘째로 말씀드릴 것은 — 바울은 이 공동체 형성을 하나님의 은혜, 곧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라는 맥락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세네카보다 인간 번영의 실재를 더 깊이 들여다본다는 점입니다. 그는 깊이의 차원을 보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 — 이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전달하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매우 비슷해 보이지만, 심층으로 들어가면 바울은 더 깊은 인류의 안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선물을 그저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가 —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서 — 흘러나오기 때문에, 더 깊은 공동체와 더 깊은 충만함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선물과 연대의 실천에서도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네카는 받는 사람의 격(格)이나 가치에 걸맞게 선물을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가치와 상관없이 모두를 향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선물을 좋은 사람이나 친구나 여러분 같은 사람에게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선물, 베풂, 사랑, 돌봄은 모두를 향합니다. 그것이 보편적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사랑하려는 욕구, 사랑을 향한 감정적 헌신을 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근대에 스토아 전통을 이어받은 인본주의자들, 예컨대 인본주의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존 스튜어트 밀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온 인류의 선을 원한다. 그러나 그것을 내 머리로 원할 뿐, 어떻게 그것을 내 마음에 담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그것을 정말로 마음으로 원할 수 없었기에 한때 정신적 붕괴를 겪기도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기독교 전통이 제공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해야 한다」는 정신적 헌신만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감정적 욕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혀, 그 사랑이 우리를 휩쓸어 감싸 안기 때문입니다.
넷째 물음 — 과거와 현재의 연결
정은창: 과거에는 선물 문화나 공동체 문화가 보편적이었지만, 이것이 점차 상업과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에 의해 대체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선물 윤리는 과거에는 충분히 유효하고 설득력 있었지만, 배경이 달라진 현대에는 어떤 수정이나 변형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까?
바클레이: 첫째로는, 당연히 그렇습니다. 사회 상황이 달라졌고, 현대의 맥락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사회와 경제에 관해 바울이 알 수 없었던 것들을 배웠기 때문에, 이것을 현대 세계에 적용하는 해석 과정에서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둘째로, 현대 세계에서 우리는 바울이 알고 있던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역사의 과정을 거치면서 잃어버리고 놓쳐 버린 것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현대 서구 개인주의는 개인이 고립된 채로도 번영할 수 있다고, 또 개인이 먼저 형성된 다음에야 비로소 타인과의 관계로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원자화된 개인」이라는 관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 자신에 관한 진실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오직 서로와의 관계 안에서만 번영하며, 우리의 정체성 자체가 그 관계들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관계 안에서 우리 자신이 됩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고립된 개인이라는 관념에는 분명 잘못된 점이 있고, 오히려 바울이 옳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은창: 여기까지 질문을 마치겠습니다. 굉장히 길었지만 충실하게 답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자리가 서로서로에게 유익한 자리였으면 좋겠습니다.
총평 — 한국 교회가 들어야 할 이야기
이상학 담임목사: 새문안교회가 함께해 온 언더우드 국제학술 심포지엄을 올해까지 일곱 번쯤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심포지엄마다 학자와 분야에 따라 풍성한 열매와 배움이 있었습니다만, 특별히 이번에 신약학자를 모시고 참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신학 강연을 통해 은혜받기가 쉽지 않은데,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저만 그런가 싶어 교인들께 여쭤 보니 「목사님, 진짜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하더군요. 어제도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역시 성경 속에서 나온 풍성한 내러티브가 전달될 때, 성경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한국 교회 청중에게는 분명한 접촉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특별히 감사했던 것은, 교수님이 「정통(orthodox)」이라는 말도, 「복음주의(evangelical)」라는 단어도, 「에큐메니컬(ecumenical)」이라는 단어도 한 번도 꺼내지 않으셨지만, 이 세 차례 강연이 바로 그 세 가지에 확고히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정통이었기에 치우치지 않았고, 에큐메니컬했기에 루터나 칼뱅 같은 개신교 전통뿐 아니라 — 세계 2천 년 기독교의 저수지라 할 수 있는 — 아우구스티누스라는 고대 교부의 신학까지 가져와 은혜의 신학이 어디에 자리매김해야 하는지를 잘 짚어 주셨습니다. 또 통합적이었기에, 강의를 들을 때 누구를 판단하거나 정죄하거나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주일에 제가 설교하며 말씀드렸듯 우리를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사랑 앞으로 이끌어 주는 강의였습니다.
여기까지 말씀드리려 했는데, 정은창 교수님이 짚어 주셔서 빠진 부분만 몇 가지 덧붙이겠습니다.
은혜는 흐름이요 소용돌이다
한 가지는, 은혜가 어떤 실체(entity)나 손에 잡히는 형체가 아니라 흐름(flow)이요 흐름(flux)이요 움직임(movement)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강(江)이라는 이미지로 형상화해 은유로 설명해 주신 것이, 일반 교인들에게 은혜를 손에 잡히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느끼셨지요? 상류를 바라보며 하류로 흘러가는데, 오늘 마지막 강의에서 그 흐름은 상류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한 곳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카리스(charis)가 유카리스트(eucharist) — 감사 — 가 되어 찬양으로 하나님께 올려 드려지는 소용돌이라고 하셨습니다. 너무 멋진 표현이었습니다.
자선이 아니라 연대로
두 번째로, 어제 강의에서 「이것은 한국 교회가 들어야 하는 이야기」라고 느꼈습니다. 물론 교수님은 한국 교회를 염두에 두고 하신 것이 아니지만, 새문안교회 목사로서 제 머리를 떠나지 않는 화두가 한국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세상에 주어질 때, 한국 교회는 자선의 형태로 은혜를 줍니다. 그 이유는 「교회는 진리의 담지자요 소유자이고, 세상은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영벌에 처할 저주받은 곳」이라는 이분법적 도식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은혜는 늘 자선의 형태로 주어집니다. 그런데 그 자선의 형태로 주어지는 은혜는 주는 사람도 망하게 하고 받는 사람도 망하게 한다는, 굉장히 중요한 진리를 이번 강연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은혜는 솔리대리티(solidarity), 곧 상호 연대의 형태로 주어져서, 주는 사람도 생명이 살아나고 받는 사람도 생명이 살아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완성하는 형태로 주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 전체가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교회는 늘 누군가에게 줄 때 표를 내고 줍니다. 전도를 위해 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하니까요. 그러다 보니 주고받음 속에서 주체와 객체가 명료하게 나뉘고, 자선이라는 기본 멘탈리티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받는 사람은 받으면서도 왠지 유쾌하지 않고, 주는 사람은 주면서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 「줬다」는 자기만족과 교만에 빠질 수 있는 함정이 있는데, 그 점을 아주 잘 짚어 주셨습니다. 이 부분이 우리 안에서 잘 적용된다면, 한국 교회가 세상을 향해 더 열리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 배타적이거나 독선적이지 않고 대화와 소통과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공동체로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같은 진리도 약자에게는 다르게 들린다
세 번째로, 오늘 강의에서 자기희생(self-sacrifice)과 자기 사랑(self-love)을 말씀하시면서, 같은 진리라도 힘 있는 자가 들을 때와 힘없는 사람이 들을 때 전혀 다르게 들릴 수 있다고 하신 부분입니다. 제가 우리 교인들에게 가끔 말씀드린 것처럼, 같은 진리라도 피해자가 들을 때와 가해자가 들을 때는 전혀 다른 결론으로 와닿을 수 있습니다. 자기희생을 이야기할 때, 힘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들으면 겸손으로 와닿을 수 있지만, 연약한 사람들이 들으면 맹목적으로 굴종해야 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한국 교회가 복음과 은혜를 좀 더 디테일하게 실천하고, 이를 우리 안에서 하나의 운동으로 만들어 갈 때 귀담아들어야 할, 참으로 소중한 부분이었습니다.
다음을 기약하며
강의 전체를 들으면서 — 제가 이 세 차례 강의를 두고 설교하며 교인들에게 했던 약속이 하나 있습니다. 「이 강의를 들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작동하여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지, 곧 변화와 새로운 삶의 자리로 이끌어 가는지 가르쳐 줄 것」이라고요. 그런데 실제로 세 강의에 걸쳐 그 이야기를 많이 듣지는 못했습니다. 은혜가 실제로 어떻게 윤리의 형태로 나타나는지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바클레이 교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은혜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바꾸고 열망을 불어넣어 선한 일에 열심인 사람으로, 새로운 지평으로 이끌어 가는지에 성도들이 더 큰 관심을 가질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질의응답에서 마침 그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열망이 실질적으로 불타오르려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서 작동해야 한다는 것 — 곧 이 카리스, 은혜, 선물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것을 확인해 준 것입니다. 다음에 여기서 좀 더 나아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참으로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될 것입니다.
이틀에 걸쳐 교회에서 이런 강의를 하시는 것이 학자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학문의 언어로 이야기하면서도 많은 예화와 은유와 이미지를 함께 전달해 주셨기에, 우리 스마트한 새문안 교우들은 충분히 듣고 모두 은혜받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애써 주신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신학교 교수님들이 교회 현장에 오셔서 교회가 신학적 목회를 할 수 있도록 도전을 주셔야 한다고 자주 말합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학문의 언어가 교회의 언어로 번역되어 나와야 하는데 많은 경우 그대로 전달되어 교인들이 알아듣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강의는 그 부분을 상당히 극복했습니다. 우리 교수님이 장로님이시라 — 평신도이시라 — 그런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잘 전달해 주신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 스태프들입니다. 번역도 너무 잘해 주셨고, 자막도 — 3년쯤 전부터 시작되어 점점 발전하여 이제는 입체적으로 한눈에 들어오고 중요한 말에는 하이라이트까지 넣어, 영어와 한국어 사이의 간극을 넉넉하게 메워 준 — 그 놀라운 솜씨를 보여 주신 진행팀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내년 140주년에는 더 아름다운 섬김과 더 멋진 강의를 기대하며, 우리 언더우드 국제학술 심포지엄에 더 많은 교우와 한국 교회가 참여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것으로 제16회 언더우드 국제심포지엄의 모든 순서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