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 강연의 제목은 「사랑은 자기희생을 요구하는가?」입니다.
어제 이 연속 강좌의 첫 강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상류(upstream)를 향해서는 은혜의 근원과 능력을 바라보았고, 하류(downstream)를 향해서는 그 흐름 속에서 헤엄치는 동안 은혜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지금도, 또 장차 올 생명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두 번째 강연에서 우리는 은혜를 입은 너그러움의 형태를 살폈고, 저는 「연대(solidarity)가 자선(charity)보다 낫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사랑을 상호적인 것으로, 또 우리 자신을 동반자(partner)로 생각하라고 권하기 때문입니다. 곧 타인에게(to), 타인을 위하여(for) 줄 뿐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with) 주라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예민하지만 중요한 한 물음 속으로 파고들고자 합니다. 사랑은 자기희생을 요구하는가? 이를 위해 저는 로마서 12장에서 15장까지의 본문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거기서 바울은 한 공동체 안의 사랑의 윤리를 요약하며, 그리스도를 그 한가운데 세움으로써 모든 구성원의 이익을 지켜냅니다.
첫째, "희생"이라는 말
로마서 12장은 여러분에게 분명 익숙한 방식으로 시작됩니다. 흔히 쓰이는 번역을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로마서 12장 1~2절)
여기서 바울은 상류와 하류를 동시에 바라보고 있습니다. 상류로는 앞선 장들에서 그가 묘사해 온 하나님의 자비 —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붙드셨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에게로 확장된 그 은혜 — 를 바라봅니다. 하류로는 이 자비와 은혜의 역동 속에 사로잡힌 사람들, 곧 마음이 변화되고 몸이 하나님을 향해 새롭게 방향을 잡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바울이 쓴 단어 '튀시아(thusia)'를 영어로 '희생(sacrifice)'이라 옮기는 것은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영어에서 사람들에게 희생이란 대개 무언가를 포기하거나 내어주는 것을 뜻합니다. 「나는 당신의 집 정리와 꾸미기를 돕느라 주말을 희생했다」, 「당신은 친구의 아이를 돌보느라 저녁 시간을 희생했다」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자기희생, 곧 내 몸을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흔히 자기 부정이나 자기 소거 — 자기 자신의 무언가를 내어 버리는 행위 — 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또 성경 다른 곳에서 이 말이 일차적으로 뜻하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무언가입니다. 강조점은 잃어버림(loss)이 아니라 드림(gift)에 있습니다. 핵심은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바치고 드리는가이지, 그 드림 속에서 그것이 사라지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사실 '튀시아'는 「예물(offering)」로 옮기는 편이 더 낫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산 예물로 드리십시오.」
여기서 핵심은 우리가 무언가를 내다 버린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하나님의 목적과의 연대와 일치 속으로 드린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강연 내내 이 구분으로 여러 번 되돌아올 것입니다. 무언가를 내어 버리고, 잃고, 부정하고, 포기하는 것과 — 무언가를 다른 누군가와의 동반과 연대 속으로 드리는 것 사이의 차이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주장하려 합니다. 사랑이 요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속으로 드리는 것, 곧 자기 자신을 그들과 함께 하나의 공동선(common good) 안에 놓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기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정확히 무사(無私, selfless)한 것도 아닙니다. 물론 이것은 사사롭고 배타적인 이익을 포기하기를 요구하며, 그것은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자신을 어떤 전면적인 형태의 자기 소거나 자기 부정 속으로 내어 버리는 일이 아닙니다.
자기희생의 그늘
타인의 선을 위해 자기를 내어 버린다는 의미의 자기희생은 많은 전통 문화에서 강력한 윤리적 가닥을 이룹니다. 여러분은 그 강점을 익히 아실 테지만, 그 어두운 면 또한 잘 아실 것입니다.
시민들이 공동선을 위해 자기를 희생해야 한다는 요구는 권위주의 국가에서 흔히 동원되어, 모든 자원을 지도자나 혁명이나 국가의 이익으로 몰아주고 개인이나 하위 집단의 이익을 짓밟습니다. 같은 호소가 기업과 일터에서도 동원되어, 지나치게 긴 노동 시간과 열악한 노동 조건이 「각 노동자가 사업이나 국가의 선을 위해 자기 이익을 희생해야 한다」는 요구로 정당화되어 왔습니다. 또 가정 안에서도 오랜 위계의 전통이 자기희생의 윤리를 이용해 왔습니다. 집안의 손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의 복리를 위해 자기 몫을 희생하도록 기대되고, 특히 여성들은 배우자와 자녀와 가족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잠재력을 희생하도록 기대되어 왔습니다.
이 모든 경우에 희생의 윤리는 위계적 사회 모델에 들어맞습니다. 그 모델에서는 아랫자리에 있는 자들이 사다리 윗칸에 있는 자들보다 더 많이 희생하도록 기대됩니다.
이제 기독교가 바로 이 모델에 아주 잘 들어맞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윤리란 정확히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 자기 상실에 관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실제로 기독교 전통의 어떤 가닥에서는, 사랑이란 상실을 동반하지 않으면 온전하지도 참되지도 않다는 식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이상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빌립보서가 말하는 「자기 비움(self-emptying)」, 곧 낮아지심과 마침내 죽으심을 포함합니다(빌립보서 2장). 그리스도를 이 모든 점에서 — 겸손, 자기 비움, 죽음에서 — 본보기로 삼는다면, 자기희생이야말로 요구되는 바로 그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사용할 로마서의 장들에서, 바울은 자신이 「강한 자」라 부르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본을 가리켜 보입니다. 로마서 15장에서 그는 말합니다. 우리 각 사람은 이웃을 세워 주는 선한 목적을 위해 이웃을 기쁘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한 것 같다고 말입니다. 로마서 14~15장은 곧 다시 다루겠습니다만, 지금 우선 주목할 것은, 바울이 방금 한 이 말이 공동체 안의 「강한 자」 혹은 「힘 있는 자」에게 특정해서 건네진 말이라는 점입니다.
「약한 자」에게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 이것은 제가 보기에 또 다른 물음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섬기는 리더십」과 「십자가를 닮음(cruciformity)」이 지도자들이 권력을 남용하고 타인을 강압하거나 조종하는 경향을 막는 해독제로 동원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약한 자에게 자기를 희생하라고 말하는 것은 그저 힘 있는 자의 권력을 더 키워 줄 뿐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일부 여성신학자들과 뜻을 같이하여, 기독교의 이상으로서의 자기희생이 어떻게 성별 위계를 강화하는 데 사용되어 왔는지를 짚고 싶습니다. 자기 자신을, 자기 은사를, 자기 경력과 기회를 희생하도록 기대받아 온 것은 바로 여성들, 특히 아내들이었습니다 — 자기희생의 규칙이 거의 일방적으로 적용되어 온 것이지요. 저는 「타인을 섬기는 일에서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여성의 특별한 미덕」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 남성들의 말을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 여성들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타인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도록 기대받는 것은 늘 우리인 것 같다」고요. 이 점에서 기독교는 가부장적 형태의 불평등을 강화해 왔고, 많은 상황에서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결정이라는 반대 극단도 답은 아니다
이제 현대 서구 문화에는 그러한 불평등에 맞서려는 충동이 담겨 있고, 모든 문화의 젊은 세대는 자기희생적 이상이라는 전통적 미덕에 점점 더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유럽의 계몽주의 이래로, 자율(autonomy)과 자기 결정(self-determination)이라는 대항 이상이 자기희생의 전통에 강하게 저항해 왔습니다. 이것이 서구 개인주의와 결합할 때 등장하는 것은, 공동선에 관한 모든 주장을 억압의 가면 쓴 형태로 의심하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이라는 주장입니다. 「내 인생을 다스리는 것은 나, 오직 나뿐이다. 내 삶의 목표는 자기실현(self-realization)이지 자기희생이 아니다. 내 목표는 타인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서 합당한 자리, 합당한 기독교적 입장은 무엇이겠습니까? 로마서의 본문들을 가지고, 저는 전면적인 자기희생에의 부름도 아니고 개인화된 자기 결정의 정당화도 아닌 하나의 항로를 그려 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열쇠는 나 자신과 타인을 모두 하나님의 사랑 안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놓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오직 나 자신과 타인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양자택일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선이냐 나의 선이냐. 내가 그들을 위해 나를 희생하든지, 아니면 내 이익을 챙기든지. 이타주의(altruism)냐 이기주의(egoism)냐.
그러나 만일 내가 나 자신과 타인을 모두 하나님에게서 와서 하나님을 향하는 하나의 선(good)의 틀 안에 놓는다면, 우리의 하나님이 주신 목적의 성취 안에서 나의 성장과 타인의 성장을 동시에 촉진하는 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어쩌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야말로, 타인을 향한 사랑과 — 심지어 나 자신을 향한 합당한 형태의 사랑까지 — 둘 다를 그 안에 놓는 틀일 것입니다.
둘째, 나를 포함하는, 하나님이 주신 선
기억하시겠지만,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마음의 변화를 말할 때 그 목적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을 수 있습니다. 선하다 — 누구에게 선하다는 것인가?
고대 세계에서 「선(good)」을 말할 때, 그것은 추상적인 도덕적 성질이 아니라 언제나 관계적인 개념이었습니다. 무언가가 선하다면, 그것은 그것을 얻는 사람에게 선한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것을 그저 「옳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들은 선을 목적, 설계, 지향의 관점에서 생각했습니다. 가령 칼이 잘 드는 것이 칼에게 선한 일이고, 소가 풀을 뜯는 것이 소에게 선한 일이듯, 사람이 자신의 가장 큰 인간적 잠재력에 다다르는 것, 곧 자신이 될 수 있는 모습 안에서 성취되는 것이 사람에게 선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선이 무엇인지 분별한다는 것은, 무엇이 옳은가에 관한 추상적 도덕 원리를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지으시고 사랑으로 존재케 하신 이들에게서 가장 좋은 것을 끌어내시려고 마음에 품으신 바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선은 공동체적이다
로마서 12장에서 이 선이 공동체적이며 개인주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즉시 분명해집니다. 바울은 내적으로 분화된 몸의 이미지로 돌아갑니다. 많은 지체가 있고 많은 다양한 은사가 있지만, 그것들은 서로의 유익을 위해 사회적으로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2장에 열거된 은사들이 고린도전서 12장의 것과 다른 까닭은, 어떤 고정되거나 완결된 목록도 제시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다양성은 어마어마합니다. 은사가 그것을 받는 각 개인에게 맞춤하여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분화를 개인의 차원에서 상상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이것이 중요합니다. 각 사람은 공동체에 소중합니다. 저마다 내어줄 무언가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선한 일이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것의 실현입니다. 그들에게서 그 은사를 계발하고 사용할 기회를 빼앗는 것은 그들과 다른 모든 이를 동시에 해치는 일입니다. 사실 그들의 개별성이 표현되고 완성에 다다르는 자리는 그들이 홀로 행동할 때가 아니라, 몸의 지체들이 서로 더불어, 서로를 위하여 행동할 때입니다.
바울이 그려내는 삶의 방식은 개인의 차원에서 인격에 고유하면서도 동시에 공동체를 지향합니다. 자아는 공동선을 위해 존재하지만, 그 공동선은 각 사람이 자신의 은사 받은 잠재력을 실현할 공간과 기회를 부여받는 데 달려 있습니다.
서로를 높이는 경쟁
여기서의 공동체적 기풍은 또한, 바울의 다른 곳에서 보았듯이, 상호적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여러분은 「서로의」 지체입니다. 여러분은 형제 사랑(필라델피아, Philadelphia)으로 서로 사랑하되, 서로를 세워 줄 책임을 지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 보았듯, 이 상호성은 불평등한 관계에서도 적용됩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0절에서 말합니다.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
누군가를 존경한다(honor)는 것은 그를 나보다 위에 두는 것, 그의 우월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계, 곧 위계적 관계를 암시합니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 나보다 위에 있는 누군가를 존경합니다. 바울과 다른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명예에 집착하고 극도로 경쟁적인 세계에 살았습니다. 보통 사람은 명예를 얻으려고, 곧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인정과 칭찬을 차지하려고 남을 능가하려 애씁니다. 목표는 그 우월한 자리에서 존경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제 보았듯, 여기 바울의 윤리가 있습니다.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 곧 서로 경쟁하되, 명예를 얻는 일에서가 아니라 명예를 드러내는 일에서 경쟁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경쟁은 명예를 얻는 것이 아니라 명예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늘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상상하면 우리의 머리는, 우리의 뇌는 뒤엉켜 버립니다. 끊임없이 이동하는 시나리오이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역학은 결코 한 방향으로 고정될 수 없습니다. 정적인 위계란 없습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 필요할 수 있는 위계가 무엇이든, 그것은 반대 방향으로 흐르는 위계에 의해 균형 잡히고 교차됩니다. 여기 그려진 그림은 상호 의존하는 공동체, 곧 연대의 수준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데 이르는 공동체입니다.
박해자를 축복하는 일
바울이 말하듯, 공동체의 경계는 열려 있습니다. 공동체 바깥에 있는 자들, 심지어 그 구성원을 박해하고 저주하는 자들조차도, 공동체로부터 말과 행위로 축복받아야 합니다. 그러한 은혜의 목적은 문을 열어 두어, 가능하다면 바깥에 있는 자도 공동체에 합류할 수 있게 하는 것 — 곧 원수를 친구로 바꾸는 것입니다. 박해자를 축복할 때, 우리는 선물의 위험을 감수합니다. 보답 없이, 되돌아옴 없이 선물을 주는 위험 말입니다 — 바울이 여기서 메아리치고 있는, 산상수훈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요점은 일방적인 선물이 더 우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어떤 상황에서는 필요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상은 형제 사랑(필라델피아), 곧 사랑이 양방향으로 흐르는 상호적인 사랑입니다. 상호성은 연대를 섬기는 데 있습니다. 그 모델은 우연히 서로에게 유익을 주는 두 독립적 행위자가 아니라, 각 동반자의 고유함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을 하나의 공동선 안에 포함하는, 포괄적이고 상호 의존적인 연대입니다.
"나냐 너냐"가 아니라 "나냐 우리냐"
현대 서구 시대는 자아와 타자, 나와 너를 그저 구별할 뿐 아니라 전형적으로 대립시키는 구조 위에 세워졌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이거나 너의 이익을 위한 것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설령 우리가 협력한다 해도, 그것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 자기 이익을 결합한 두 독립적 행위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또 고대의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선택지가 「나냐 너냐」 사이에 있지 않고 「나냐 우리냐」 사이에 있습니다. 나는 순전히 사사로운 이득을 위해 행동할 수도 있고, 우리 모두의 공동 이익 — 곧 「우리」 — 을 위해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우리」 안에 나는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라는 구조 안에서 나의 이익은 너의 이익과 맞세워지지 않으며, 우리는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것을 함께 추구합니다.
은사의 고유함에서 보았듯, 그 공동선은 각 개별 지체의 번영에 달려 있습니다. 그 지체의 개별성은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은사로 이루어진 한 몸 안에서 지켜지고 심지어 고양됩니다. 그리고 그 은사 됨(giftedness)이라는 관념은, 바울에게 결정적이며 그의 공동체관 전체를 가르는 핵심을 지켜냅니다. 곧 은사 받고 잘 질서 잡힌 공동체는 궁극적으로 한 주는 이(giver)에게 의존하며, 따라서 그분께 책임을 진다는 것입니다. 은사를 주시는 분 하나님이야말로, 공동체 위에 그리고 그 너머에, 또 공동체 안의 어떤 지도자 위에 그리고 그 너머에 계신 권위이십니다.
셋째, 나와 타인 사이에 그리스도가 서 계신다
우리가 짚었듯, 「나를 포함하는 우리」의 문제는, 권력을 쥔 자들이 「모두의 유익」을 주로 자기들 — 곧 지도자들 — 에게 유익하고 모두에게 똑같이 유익하지는 않은 방식으로 규정해 버리기가 너무 쉽다는 데 있습니다. 무엇이 모두의 선인지 누가 결정합니까? 국가도, 기업도, 배우자도, 집단의 선을 섬긴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힘없고 주변부에 있는 구성원을 방치하거나 학대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억압 혹은 학대의 문제가, 서구에서 개인의 자율이라는 강력한 대항 주장을 정당화해 왔습니다. 공동체가 그 구성원을 착취하지 못하게 막는 유일한 길은, 각 구성원이 자기 자신의 개별적 주권적 권리를 확립하는 것뿐인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유일한 길입니까?
로마서 14~15장에서 바울은 로마에서 바로 이런 권력의 역학이 작동하던 상황을 다룹니다. 그가 묘사하는 정황을 우리가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실제라기보다 가설적인 것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강한 내부 분쟁이 있는 공동체의 역학을 묘사합니다. 어떤 구성원들 — 강한 자들 — 은 다른 이들을 그들의 양심의 거리낌 때문에 멸시하고, 반대로 그 다른 이들 — 약한 자들 — 은 나머지가 마땅히 해야 한다고 그들이 여기는 바를 하지 않는다고 몹시 비판합니다.
바울이 그리는 상황에서, 어떤 이들은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으며, 어떤 날들을 다른 날보다 특별하게 지킵니다(로마서 14장). 바울이 말하는 것은 아마도 채식주의가 아닙니다 — 물론 그의 시대에 채식주의가 존재하기는 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에 관한 유대 문화의 거리낌, 그리고 하나님께 특별한 날인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의 관습입니다. 로마 교회의 유대인 구성원들, 혹은 적어도 유대 전통의 강한 영향을 받은 이들이, 유대의 음식 관습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 신자들을 몹시 비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동 식사의 고기가 유대적 기준에서 부정하거나 우상숭배로 더럽혀졌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그들은 식사의 어떤 부분을 함께 나누기를 거부하며 고기를 먹는 이들을 몹시 비판합니다. 동시에 그들은 유대의 안식일을 지키면서, 그 관습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비판합니다. 반대편에서는 이방인들, 적어도 강한 자들이 이런 유대적 거리낌을 비웃으며 그것을 지키는 자들을 멸시합니다.
여기 로마 교회 안에 문화적 충돌이 있습니다. 다수 혹은 적어도 더 힘 있는 구성원들이 자기 의견과 관습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지요. 강한 자들은 모두의 선을 추구한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약한 자들에 관한 한 그들 자신의 복리는 포함되기는커녕 방치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를 포함하기는 하지만, 그 「나」는 바로 그 포함됨에 의해 짓눌리고 있는 것입니다.
본회퍼의 통찰
바울의 응답은 독일 신학자 본회퍼가 공동체의 삶을 성찰하며 남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나와 타인 사이에 그리스도가 서 계신다.」
바울은 약한 자가 힘 있는 자의 이익을 위해 희생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 위험에 맞서는 방식은, 그들 사이에 그리스도를 세우고, 강한 자든 약한 자든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께 책임을 진다고 못 박는 것입니다. 그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멸시하는 것도, 약한 자가 강한 자를 판단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들 각 사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가치는 인간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고 결정됩니다. 더 중요하게는, 4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남의 종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고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그가 서게 될 것이니, 이는 주께서 그를 세우실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14장 4절)
이것은 즉시 집단의 역학을 바꿔 놓습니다. 내가 판단하거나 멸시하고 싶어지는 공동체 안의 사람들 — 그들에게는 더 높은 충성과 더 깊은 책임의 대상이 있습니다. 그들은 내게 속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먼저 공동체에 속한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어떻게 처신하는지, 어떻게 번영하는지를 결정하시는 분은 그들의 주님이십니다. 나와 그들 사이에 그리스도가 서 계십니다.
책임이 따르는 책임성
이 책임성에는 하나의 책무가 따릅니다. 바울이 말하듯 우리 각 사람이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는다면, 주님의 소유를 돌보는 것이 우리의 책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이 19절에서 말하듯 서로를 세워 주기를 힘쓴다는 뜻입니다.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단지 서로를 해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워 준다는 것은 그들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장을 촉진하고, 계발하고, 고양시키려 애쓰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모든 사람이, 누구도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해를 입거나 무너지지 않도록 보장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이 — 심지어 더 약한 구성원까지 — 그리스도와의 더 깊은 사귐 속에서 세워지고, 성숙해지고, 자라고, 확장되도록 보장할 책임이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또 타인을 위해서도 이를테면 하류를 바라보는 일이 중요해집니다. 하나님은 공동체의 각 구성원을 위해 무엇을 예비해 두셨는가? 그들이 자기 은사를 발휘하는 가운데 어디서 그리스도 안의 잠재력을 점점 더 키워갈 수 있는가? 어디서 그들이 지금의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될 수 있는가? 곧 더 많이 줄 수 있고,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뜻하신 것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결정적으로, 그 물음의 답을 결정하는 것은 단지 나에게나 힘 있는 자에게나 공동체의 지도자에게 달린 일이 아닙니다. 약한 자들 자신도 그 문제에 발언권을 가집니다. 사실 바울은 이 단락에서 자신이 의견을 달리하는 더 약한 구성원들의 견해를 배려하는 데 놀라우리만치 멀리 나아갑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또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으되, 다만 어떤 것을 부정하다고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부정하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관점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22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네가 가진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네 자신의 확신으로 간직하라.」
이것은 자기 결정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자아의 책임성 — 곧 하나님 앞에 선 각 개별 자아의 책임성 — 에 관한 것입니다. 더 약한 구성원들의 목소리에 내가 참으로 귀 기울이도록 보장하는 것은 나의 책무입니다. 그들이 속한 주님께 내가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타인 사이에 그리스도가 서 계십니다. 우리를 함께 묶으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지만, 내가 타인에게 나 자신을 직접 강요하지 못하게 막으시는 분도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공동의 가치를 세우시는 분도 그리스도이지만, 힘 있는 자의 권력을 제한하시고 그들 또한 하나님께 책임지게 하시는 분도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목표를 정하시는 분도 그리스도이며, 그 목표에는 각 사람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의 사람이 되도록 세워지고 계발되고 고양되는 일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번영한다는 그 상호적 배려의 비전은, 각 사람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며 — 거기에는 나 또한 포함됩니다. 나 역시 세워지도록 의도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의미에서, 타인을 사랑하는 가운데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일일까요?
넷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은 사랑을 말하며 레위기의 본문을 인용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이웃 개념을 확장하신 예수의 가르침과 더불어 우리가 충분히 잘 이해합니다. 그러나 「네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네가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입니까? 아니면 같은 정도로 사랑하라는 뜻입니까? 어느 쪽이든, 여기서 자기 사랑은 어쩐지 — 마치 자명한 것처럼, 또 실제로 타인 사랑을 재는 합당한 기준인 것처럼 —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가르침을 바울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 산 예물로 드리라」는 맥락 안에 놓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실상 세 개의 사랑 계명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타인을 사랑하라, 그리고 너 자신을 사랑하라. 같은 방식으로, 기억하시겠지만 예수께서도 사랑의 계명들을 함께 묶으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므로 하나님과 이웃과 자아가 모두 그림 안에 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서로 어떻게 관계 맺느냐입니다.
자기 사랑에 대한 개신교의 의심
최근 몇 세기 동안, 특히 개신교 전통 안에서, 자기 사랑을 전적으로 부정적인 현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안으로 굽어든 것처럼 들립니다. 루터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직 우리 이웃에게로 돌이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듯 우리 자신을 그들에게 내어준다는 것입니다. 칼뱅은 「자기 부정이야말로 그리스도인 윤리의 본질」이라고 말했습니다 — 자기로부터 하나님께로, 자기로부터 타인에게로 돌이키는 것이지요.
실로 그 사유의 노선에서 우리는 서로 배타적인 두 대립항 사이의 선택지를 제시받습니다. 너 자신을 사랑하든지(그것은 이기주의), 타인을 사랑하든지(그것은 이타주의). 자아에 대한 어떤 관심도 이기심으로 물든 것처럼 보입니다. 그 반대로서의 이상은 무사(無私, selflessness)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무사(selfless)」라는 말이 함축하듯, 여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내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아냐 하나님이냐, 자아냐 타인이냐 둘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길
그러나 우리가 예컨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발견하는 더 오래된 기독교 전통은, 우리가 으레 갈라놓는 것들을 함께 붙드는 길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으뜸가는 계명은 우리의 근원이자 목표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표현으로 하면, 가장 먼저 또 가장 중요하게 말할 것은, 우리가 우리 몸을 포함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산 예물로 드린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과 우리의 다른 모든 사랑은 그 목표를 향하게 되어 있으며, 하나님을 향한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지향 안에 포함됩니다. 우리가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또 우리가 하나님께 자신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기에 그들을 사랑하며, 또한 그들이 그들의 참된 성취의 근원이자 방편이신 하나님을 알아보고 그분께 응답하기를 바라기에 그들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타인을 사랑하는 것 사이에서 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순종 안에서, 또 그것 때문에 타인을 사랑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합당하게 빚어진 자기 사랑에 대해서도 똑같은 것이 참될 수 있다고요. 물론 합당하지 못한 자기 사랑도 있습니다. 타인과 나누어야 할 것을 나에게로 거머쥘 때, 나를 타인보다 우선하여 타인을 희생시켜 가며 내 유익을 도모할 때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 포함된, 합당한 자기 사랑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가운데 번영하고 우리의 온전한 인간적 잠재력에 다다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냐 나 자신이냐, 타인이냐 나 자신이냐」 하는 양자택일 대신, 우리는 이것을 하나의 피라미드로 그려볼 수 있습니다. 어제 누군가 3차원 은유를 원하셨으니, 3차원 은유를 드리겠습니다.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피라미드의 정점, 곧 꼭대기에 계시고, 타인과 우리는 그 정점 아래 피라미드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타인을 사랑하고 또 우리 자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선과 번영이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한에서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은 우리를 포함하며,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잃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산 예물로 드리는 것은, 우리 자신을 내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위와 존엄을 주셨음을 — 곧 우리가 그분께 소중한 존재이며 그분이 우리의 성취를 바라심을 —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죽으셨다"
저는 방금, 바울이 로마서 14장에서 약한 자를 존중과 사랑으로 대해야 할 이유로 든 한 가지 핵심을 지나쳐 왔습니다. 바울이 「강한 자」라 이름 붙인 이들은 약한 자를 모욕하거나 배제할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네 형제가 네가 먹는 것으로 인해 상처를 받는다면, 너는 더 이상 사랑 안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죽으신 그 사람을,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로마서 14장 15절)
형제자매가 중요한 그 근거에 주목하십시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죽으신」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소중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소중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가장 충만하게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타인이 중요한 이유라면, 분명 같은 것이 나에게도 적용됩니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말하듯,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타인이 하나님께 소중하기에, 또 하나님을 향한 내 사랑에서 흘러나와 타인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똑같은 이유로, 똑같은 틀 안에서,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로서, 하나님을 위해 설계되고 하나님을 향해 정해진 자로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이것은 나를 하나님으로부터 또는 타인으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나의 우선적 지향 안에서, 또 타인을 향한 내 사랑과 나란히 의미를 갖는 사랑입니다. 나와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또 하나님을 위해 함께 번영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대가와 위험
물론 타인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까다롭고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말하는 우리의 변화를 포함합니다. 그것은 단지 지금의 우리를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자기 안으로, 타인에게서, 하나님에게서 굽어들게 하는 이기적 성향과 욕망을 잃어버리는 일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바울이 「육신의 일」이라 부르는 것 — 우리의 성취를 가로막는 자기 파괴적 행습과 반사회적 습관 — 을 죽이는 일을 포함합니다. 이것들을 죽이는 것은, 타인과 하나님과 더불어 합당하게 번영하는 일을 제약하는 모든 것을 가지치기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또한 위험을 동반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때로 선이라 여기는 것들 — 돈, 시간, 건강, 심지어 생명 같은 자연적 선들 — 의 상실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위험입니다. 그러나 그 상실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마치 고난이나 상실로서의 희생 자체에 어떤 특별한 미덕이 있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미덕은 사랑이며, 우리는 그 사랑에서 따라오는 것이 무엇이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이 가장 충만하고 가장 위대한 완성에 이르도록 의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곳이면 어디든, 심지어 우리 십자가를 지고서라도 따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궁극적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은 우리 생명을 잃거나 우리 자신을 잃기 위함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우리가 본래 되어야 할 모습으로 가장 충만하고 가장 온전하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맺으며
사랑은 자기희생을 요구합니까?
만일 우리가 「자아」를 개인의 사사롭고 배타적인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정의한다면, 그런 자아는 분명히 포기되어야 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공동선, 곧 공동체 전체의 선에 헌신하며,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자아가 오직 자기실현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현대의 원자화된 개인이라는 비전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가족과 공동체와 교회와 국가와 온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일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부자의 이기심도, 자기 자신이나 자기 가까운 무리나 자기 나라만 위대하기를 바라는 힘 있는 자의 고립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 공동선에 대한 헌신은 나에게, 나를 배타적으로 특권화해 주는 것들의 상실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나는 상실이나 고난 그 자체를 우상으로 떠받들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나를 포함하는 공동선을 위해 일한다면, 우리는 「너냐 나냐」, 「이타주의냐 이기주의냐」라는 양극단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우리를 함께 묶는 끈이며, 우리는 함께 번영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연대의 윤리이지 일방적 자선의 윤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타인과 함께 울고 그들이 나와 함께 우는 공동체입니다. 그 연대 안에서 의무와 책임은 상호적입니다. 한 사람의 이익을 타인을 위해 일방적으로 희생시키는 일이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 약한 자와 주변부에 있는 자를 포함해 — 모든 사람의 이익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희생양이나 제물로 바쳐지는 어린 양의 자리에 남겨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공동체 안으로 드리지만, 우리 자신을 내어 버리지는 않습니다.
동시에 나는 하나님께 책임지는 존재이자 하나님께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 충성과 사랑에는 타인을 향한 돌봄과 나 자신을 향한 돌봄이 함께 포함됩니다. 나는 다른 누구보다 하나님께 더 소중하지도 않지만, 또한 덜 소중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속해 있기에, 어떤 인간도 내가 하나님과 맺은 그 끈을 침범할 수 없습니다. 그 끈은 나를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책임지게 하지만, 또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있게 합니다. 나를 심판하실 분도 그리스도이지만, 나를 세우실 분도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나 자신을 내어 버릴 수 없으며, 누구도 내게 그러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서 일하고 계시며, 여러분은 하나님의 일을 파괴하거나 손상시켜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것이 가리키는 바는, 그리스도인이 공동체를 향해 있고 공동선에 헌신하되, 무조건적이거나 무비판적인 방식으로 그러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개인주의자가 아니며, 타인을 희생시켜 우리 자신을 우선하려는 현대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동선이라는 관념이 타인을 짓누르거나 우리 자신을 짓누르는 데 사용된다면, 우리는 거기에 순응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선량한 시민이지만 동시에 까다로운 시민입니다. 우리는 한 제도의 충실한 구성원이지만, 그것을 넘어서고 그 위에 있는 충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위계를 견뎌낼 수 있되, 그 위계가 불평등을 뒤집고 천대받는 자에게 더 큰 영예를 돌릴 길을 찾는 한에서만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기희생을 부추기는 문화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의 이익을 살핍니다. 바울과 함께 우리는 이렇게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자들을 감히 해치지 말라.」
세 강연을 돌아보며 — 선물 안에서 살기
이 세 번의 언더우드 강연을 돌아보면, 제가 이 강연들에 「선물 안에서 살기(Living in the Gift)」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안에서(in)」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여러 다른 방식으로 저는, 창조의 선물들 안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 혹은 선물에 「참여하는 것」을 말해 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선물에의 참여를 두 가지 방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혜자(beneficiary)로서의 참여이고, 다른 하나는 그 변혁적 동력 안에서 함께 일하는 협력 행위자(co-agent)로서의 참여입니다.
수혜자로서, 마치 어느 축구팀의 팬들처럼,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고 그것을 이런저런 형태의 너그러움으로 전달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는 은혜의 원 안으로 들어가, 크든 작든 갖가지 선물의 형태로 그것을 앞으로 흘려보냅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 은혜를 타인으로부터도 받습니다. 우리가 코이노니아(koinonia) 안에서, 곧 상호성으로 표현되는 은혜의 연대 안에서 그들과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서로에게서 서로에게로 흐르는 평등하게 하는 역동 안에서 오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은혜 안의 협력 행위자, 이를테면 함께 뛰는 선수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합니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 하류로 실려 가면서, 그 과정에서 은혜의 변혁적 일하심을 통해 물살을 따라 헤엄치는 법을 배웁니다. 우리가 사랑의 일 가운데 우리 자신의 의지와 선택을 발휘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하나님께는 중요합니다. 우리가 단지 주는 자에 그치지 않고 즐거이 주는 자, 곧 받은 것을 사랑하고 주는 것을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 말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에게,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상류를 바라볼 뿐 아니라,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무엇을 행하고 계신지, 또 하나님이 우리를 무엇이 되도록 도우시는지 — 를 생각하도록 권해 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다면, 그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물음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받을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기에, 타인을 온전히 또 충만히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사랑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 또한 성취되고 만족된다는 것도 참입니다. 나의 번영과 내가 사랑하는 이의 번영은 서로 맞세워질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행하도록 설계된 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가운데, 또 합당한 의미에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가운데, 나는 내 최선의 모습이 됩니다. 바로 그 때문에 저는 자기희생에 관한 그 어떤 전면적이거나 포괄적인 관념에도 저항해 왔습니다. 합당한 방식으로, 합당한 이유로, 여러분이 줄어들거나 사라지도록이 아니라 번영하고 성취되도록 설계되었다는 사실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성취는 물론 자기실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더욱 참여하는 데서 옵니다. 이를테면 은혜의 원의 중심을 향해 더 깊이 나선을 그리며 들어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적어도 이 생에서는 우리가 결코 그 가장 깊은 곳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기에, 이 모든 말을 마친 지금 끝맺기에 가장 좋은 자리는, 어쩌면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끝맺은 그 방식일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그분의 선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린도후서 9장 15절)
감사합니다.